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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맛없는 라면은 ‘했더라면’ 그래서 환갑 모델 도전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중앙일보 ‘인생사진 찍어드립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만, 두런두런 이어지는 대화가 끝나질 않습니다. 서로 서로 고맙다고 말하는 사이니, 긴 시간 마음이 오가는 중인가 봅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만, 두런두런 이어지는 대화가 끝나질 않습니다. 서로 서로 고맙다고 말하는 사이니, 긴 시간 마음이 오가는 중인가 봅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보국(61)씨는 “강원 삼척 두타산 천은사에서 동은 스님과 찍고 싶다”며 ‘인생 사진을 찍어 드립니다’에 사연을 보내왔다. 이씨는 동은 스님과 2004년 단기 출가에서 처음 만났다. 이씨는 19년째 이어진 인연에 대해 “삶의 고비마다 위로와 격려를 해준 분”이라고 했다. 사연을 들어봤다.

“군대 제대 후 국내 회사에 다니다가 1991년 외국계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게 됐습니다. 당시 주 5일 근무하던 회사였습니다. 다시 국내 반도체 회사로 옮겼다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만나 실직했습니다. 2004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단기 출가를 경험했습니다. 또 백두대간 종주, 국토 도보 종단, 산악 마라톤 등에도 도전했습니다. 인생의 좌표를 확인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40대 초반, 청소업을 시작했습니다. 엔지니어 대신 청소부라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된 겁니다. 또 대학 사회복지학과와 평생교육학과에 편입해 공부했습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치매 어르신들 노후를 아름답게 만들어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봄에는 대학 시니어 모델 학부에 새롭게 도전했습니다. 삶의 가치를 만들고 다듬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생길이 험난해질 때마다 이씨는 동은 스님에게 삶의 길을 물었고, 다시 일어나 새로운 길을 찾곤 했다. 그에게 동은 스님은 삶의 스승이었다. 동은 스님에게 이씨는 어떤 사람일까.

“제가 오대산 월정사 단기 출가학교 교장으로 1기부터 20기까지 졸업시켰습니다. 이보국씨는 4기였고, 법명이 대각이었어요. 사실 인생의 변곡점 때 돌파구로서 단기 출가하는 경우가 많아요. 대각님도 마찬가지였고요. (졸업 후 19년째 인연은) 정말 드문 경우죠. 가끔 연락하는 분들은 있지만, 꾸준히 1년에 몇 번씩 왔다가는 분은 없습니다. 대각님은 다양한 인생 경험을 했고, ‘내 인생 왜 그래’라며 타락할 수도 있는데. 다시 일어나고, 새로운 일을 꿋꿋하게 시작하는 모습에 ‘참 대단하다’고 늘 생각합니다.”

옆에서 듣던 이씨가 “여기 동은 스님이 계시니 그걸 빌미로 편안하게 다녀갈 수 있다. 늘 송구하고 감사하다”고 말하자, 동은 스님이 오히려 “여기를 그런 장소로 생각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더구나 도반처럼 지내니 이 또한 참 고맙다”고 말했다. 서로가 고마운 사이인 셈이다.

모두가 은퇴를 생각할 나이에 이씨는 다시 공부하고 있다. 지난해 시니어 모델 학부 1학년이었으니, 새해 2학년이 된다. 이 나이에 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을까. 이씨 얘기를 들어봤다.

“환갑이 지나면서 나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일(사회복지사)도 일하는 연령이 계속 높아지고요. 건강하다면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늙어서까지 할 수 있겠더라고요. 시니어 모델이 인생 3막의 새 길이 될 것 같았습니다. 모델 공부를 하면, 누군가한테 (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스스로 (나에 대한) 모델을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씨는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라면이 뭔지 아느냐”고 묻더니 “했더라면”이라고 자답했다. 우스개지만, 그에겐 삶의 지표다. ‘했더라면’이 되지 않도록 그는 신발 끈을 동여매고 길을 나선다.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 만든 그길로.

※중앙일보 디지털에서 진행 중인 [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 프로젝트 사연과 기사체를 그대로 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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