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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토끼는 숨 쉬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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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2023년 계묘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 곳곳에 '토끼' 작품 10점이 새로 전시됐다. 문자도 병풍에 포함된 달나라 토끼 그림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2023년 계묘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 곳곳에 '토끼' 작품 10점이 새로 전시됐다. 문자도 병풍에 포함된 달나라 토끼 그림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모두 토끼 때문이었다. 지난해 성탄절 타계한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에 나오는 ‘꼽추’와 ‘앉은뱅이’가 그랬다. 도망친 서커스단 사장을 찾아 나선 날 “오늘 죽어 살면서 내일 생각은 왜 했을까”라는 꼽추의 질문에 앉은뱅이가 대답했다. “목돈이 필요했으니까. 토끼새끼들을 넣어 기를 토끼집이 필요했지.”

 조 작가의 사후 다시 집어 든 『난쏘공』에서 토끼는 오직 이 대목에만 등장한다. 그래도 계묘년 벽두에 마주친 소설 속 토끼는 각별했다. 『난쏘공』의 중심인물 ‘난장이’가 갖은 모멸과 고통, 즉 지독한 가난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토끼새끼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감상에도 젖었다.

반세기 전 『난쏘공』의 가난한 일상
2023년 ‘생존의 한 해’와도 연결돼
소외계층 안전망 더욱 촘촘해져야

 토끼 하면 둥근 달이 ‘단짝’이다. 새해 축하 그림 메시지가 그랬다. 그중 전각가 진공재의 소품이 눈에 띄었다. 토끼 두 마리가 방아를 찧는 예의 그 장면인데, 거기에 달린 문구가 웅숭깊다. ‘언덕 위 풀꽃 뜯을 때는 각각/ 달나라 방아 찧을 때는 함께’다. 손에 손잡고 가는 새해에 대한 바람이리라.

1978년 6월 출간된 `문학과지성사` 의 초판본 (왼쪽)과 2000년 7월 장정을 바꿔 나온 `이상과힘`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앙포토]

1978년 6월 출간된 `문학과지성사` 의 초판본 (왼쪽)과 2000년 7월 장정을 바꿔 나온 `이상과힘`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앙포토]

 『난쏘공』의 난장이도 달나라를 소망했다. 그의 꿈은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보는 것이었다. 그에게 달은 사랑의 땅.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이 기계로 전락한 곳이 아닌 ‘모두에게 할 일이 있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물론 그 꿈은 이뤄질 수 없었다.
 지난 4일자, 중앙일보 등 주요 일간지는 약속이라도 한 듯 1면에 달에서 본 지구 사진을 실었다. 한국 최초의 달 탐사 궤도선 다누리가 촬영한 지구와 달 표면 풍경이다. “마침내 우리도 달에 간다”는 기대에 뿌듯했지만 달나라 근무를 꿈꾸었던 난장이도 떠올랐다. 물론 다누리호 사진에는 토끼가 없다. 하지만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는’ 난장이의 소망은 여전히 애달프다.

 『난쏘공』은 1970년대 얘기다. 고도성장기의 그늘을 보듬었다. 노사문제·빈부차별에 분노하되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지금껏 321쇄, 148만여 부가 팔린 ‘문학적 사건’으로 꼽히는 이유다. 게다가 소설 속 노조는 회사 편을 드는 ‘어용’에 가깝지만 2023년 민노총 등 오늘의 거대 노조단체는 기득권과 개혁 대상 1순위로 언급되니 격세지감도 느낀다. 그런데도 부의 양극화는 수그러들 줄 모르니 이 또한 대단한 모순이다.
 다시 토끼 얘기다. 예전 ‘귀여운’ 토끼가 이제 ‘무서운’ 토끼로 돌아왔다. 지난해 영국 부커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이른바 K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다. 상대방을 짓누르고 연줄과 금력으로 일어선 기업인 집안이 토끼의 저주를 받아 처참하게 붕괴하는 공포 판타지다. 연약한 토끼의 역습이랄까. 약육강식, 뒤틀린 세상에 대한 비판이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신년음악회 풍경이 흥미로웠다. 국악·성악·가요·뮤지컬 등 정상급 음악인이 출동한 이날, 윤석열 대통령 부부 옆에 소설가 정보라가 함께했다. 지난해 한국문학을 빛낸 작가로 초청받았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자유와 경쟁’을 내건 윤 대통령과 ‘차별과 약자’를 파고든 작가의 동석이 기자에겐 꽤 낯설어 보였다. 대립 속 긴장과 비슷했다.

 이날 음악회에는 장애인 예술가, 한부모 가족, 소년가장 등 소외계층이 다수 초청됐다. 통합의 메시지다. 다만 보여주기 이벤트로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더욱 중요한 건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짜는 일이다. 반세기 전 난장이 가족을 옭아맨 ‘강자들의 법’은 여전히 막강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올 우리 사회의 화두는 생존, 가난한 토끼들의 추락이 더는 없으면 한다. “옛날 잠수함엔 토끼를 태웠답니다. 토끼의 호흡이 정상에서 벗어날 때부터 여섯 시간을 최후의 시간으로 삼았지요. 그 후엔 모두 질식하여 죽게 되는 거요.”(박범신 ‘토끼와 잠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