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아로 태어나고 쿠데타로 집권…피난길 고개 넘은 왕의 반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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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호 24면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21〉 전남·전북 잇는 갈재

순(詢)이 몽진(蒙塵)했다. 거란의 2차 침입 때인 1010년 12월(음력), 요즘 같은 한겨울이었다. 몽진은 왕의 피난을 뜻한다. 그렇다면 ‘순’은?

전북 정읍시 입암면 옛 호남선 철길의 터널 내부. 1987년 호남선 복선화로 철길 일부 구간이 사라지면서 1914년 만들어진 두 개의 터널도 '폐터널'로 이름을 고치게 됐다. 김홍준 기자

전북 정읍시 입암면 옛 호남선 철길의 터널 내부. 1987년 호남선 복선화로 철길 일부 구간이 사라지면서 1914년 만들어진 두 개의 터널도 '폐터널'로 이름을 고치게 됐다. 김홍준 기자

왕의 사후에 붙은 ‘묘호(廟號)’는 현종(顯宗·왕순, 992~1031)이다. 고려 8대 국왕인 그의 출생과 즉위 직전·직후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고려의 전성기를 닦았다는 평을 받는다. 과감한 제도 개혁과 뚜렷한 인사·신상필벌이 그의 묘호처럼 두드러진다(顯·현). 몽진을 겪은 현종의 반전은, 한 고개에서 이뤄졌다. 갈재(葛岾)다.

지난달 21~23일 사흘간 순창에 60㎝, 정읍에 50㎝ 안팎의 눈이 내렸다. 정읍역 앞 한 상인은 “67년 살면서 2005년(12월 중하순 누적 180㎝)에 이어 두 번째로 맞은 폭설”이라며 “배달을 3일간 못했을 정도”라고 밝혔다. 그런데 50㎞ 떨어진 완주에는 불과 2.5㎝만 내렸다. 물기를 머금고 북서쪽에서 온 눈구름이 노령산맥에 부딪히면서 정읍과 순창 일대에 폭설이 쏟아진다는 분석이다. 노령산맥의 ‘노령’은 갈재의 다른 이름이다. 산맥 이름으로 쓰였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고개라는 의미다.

갈재는 왼쪽의 전북 정읍과 오른쪽의 전남 장성을 잇는다. 사진을 촬영한 방장산 맞은편 입암산 아래로 국도 제1호선, 호남선 철도, 호남고속도로 등이 차례로 보인다. 호남선 고속철도는 방장산 밑으로 들어간다. 김홍준 기자

갈재는 왼쪽의 전북 정읍과 오른쪽의 전남 장성을 잇는다. 사진을 촬영한 방장산 맞은편 입암산 아래로 국도 제1호선, 호남선 철도, 호남고속도로 등이 차례로 보인다. 호남선 고속철도는 방장산 밑으로 들어간다. 김홍준 기자

무졸이 화살 쏘며 왕 거쳐 침범 시도

갈재의 다른 이름인 노령(蘆嶺)에서 따온 호남선 노령역(사진 가운데 갈색 건물) . 1970년 만들어진 뒤 2008년부터는 여객 열차는 무정차 통과하고 있다. 2023.1.3 김홍준 기자

갈재의 다른 이름인 노령(蘆嶺)에서 따온 호남선 노령역(사진 가운데 갈색 건물) . 1970년 만들어진 뒤 2008년부터는 여객 열차는 무정차 통과하고 있다. 2023.1.3 김홍준 기자

‘왕(현종)이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로 들어갔다(고려사절요 1011년 1월 13일).’ 일제강점기에 ‘노령’이라는 한자어 표기를 만들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고려사절요에서도 보듯 이전부터 쓴 말이다. 갈재는 전북(정읍시 입암면)과 전남(장성군 북이면)의 연결고리다. 위령(葦嶺)·적령(荻嶺)이라고도 부른다. 고개 근처에 많다는 갈대의 ‘갈’을 음차해 이름(갈재)을 붙였고 노령·위령·적령도 갈대 혹은 물억새에서 비롯된 말이다.

“갈재에는 갈대가 없네요.” 지난 3일, 갈재를 낀 방장산(743m)에서 물어봤다. 전국 3000개 산을 답사한 인스타그램 닉네임 '백운산'은 "고갯마루에서 장성 쪽으로 내려가면 우측 습지에 갈대가 많다"고 밝혔다. 내비게이션으로 검색되는 장성갈재(276m)는 원래의 갈재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호남 곡창지대의 산물을 쉽게 가져가기 위해 도로를 깔았는데, 그게 장성갈재(갈재로~정읍남로)다. 옛 갈재 고갯마루(220m)는 그보다 동쪽에 있다. 1000여 년 전 겨울, 현종은 이곳을 지났다.

전남 장성 방향에서 장성갈재 고갯마루를 통해 전북 정읍으로 넘어가는 이륜 차량. 이 도로는 옛길 옆에 난 신작로다. 김홍준 기자

전남 장성 방향에서 장성갈재 고갯마루를 통해 전북 정읍으로 넘어가는 이륜 차량. 이 도로는 옛길 옆에 난 신작로다. 김홍준 기자

갈재 옛길 고갯마루.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전북 정읍시 입암면으로 본 방향이다. 김홍준 기자

갈재 옛길 고갯마루.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전북 정읍시 입암면으로 본 방향이다. 김홍준 기자

1009년 18세에 즉위한 ‘초보 국왕’ 현종에게 거란군의 침입은 버거웠다. 허인욱 한남대 사학과 교수는 “현종은 사생아라는 출생 콤플렉스, 측근인 강조(964~1010)로 하여금 선왕인 목종(980~1009)을 몰아내고 시해(강조의정변)하게 했다는 민심의 이반을 극복할 과제가 있었다”며 “그 와중에 강조의정변을 구실로 침입한 거란군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설명했다.

현종의 출생은, 요샛말로 하면 꼬여 있다. 현종의 어머니 헌정왕후 황보씨(?~992)는 태조 왕건의 친손녀로, 고려 5대 국왕 경종(955~981)의 계비다. 왕씨가 아닌 황보씨인 이유는 계비가 되면서 조모 신정왕후(?~983)의 성을 물려 받았기 때문. 경종이 죽은 뒤 비는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 즉 숙부인 왕욱(王郁, ?~996)과 사통해 현종을 낳았다. 당시 국왕인 성종(960~997)은 왕욱을 유배 보냈다. 허 교수는 “고려 초기에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왕실 근친혼이 성행했지만, 간통은 죄였다”라며 “성종은 사통보다는 아랫사람(왕욱)이 윗사람(헌정왕후)을 범한 걸 중죄로 여긴 것 같다”고 밝혔다.

53일간의 나주 몽진은 현종에게 시련이었다. 많은 고려인이 그랬듯, 거란의 침입으로 신하들은 나라가 끝장났다고 생각했다(허인욱 교수).

전남 장성군 북이면 신흥리에 있는 급수탑은 1914년 호남선이 이곳에 완성되면서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해 주기 위해 세워졌다. 경주 첨성대를 연상케 하는 구조로, 당시 수준 높은 건축기술을 동원했다고 한다. 1967년 경 증기기관차가 운행을 멈추면서 이곳 신흥리역 급수탑도 기능을 멈추고 말았다. 김홍준 기자

전남 장성군 북이면 신흥리에 있는 급수탑은 1914년 호남선이 이곳에 완성되면서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해 주기 위해 세워졌다. 경주 첨성대를 연상케 하는 구조로, 당시 수준 높은 건축기술을 동원했다고 한다. 1967년 경 증기기관차가 운행을 멈추면서 이곳 신흥리역 급수탑도 기능을 멈추고 말았다. 김홍준 기자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렀을 때, 유종과 김응인 등이 “신들이 청하건대 먼저 석파역(石坡驛)에 가서 음식을 마련한 뒤 영접하겠습니다”라고 아뢰고는 마침내 도망쳤다(1011년 1월 5일).’

향리가 왕을 우습게 알았다. ‘창화현(昌化縣)에 이르렀는데, 어떤 아전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아십니까”라고 하였다. (이 아전은 현종이 즉위 전 왕위 계승을 견제한 천추태후(964~1029, 경종의 비이자, 성종의 여동생이자, 목종의 어머니이자, 현종의 이모)가 수차례 보낸 암살자들을 가까스로 피하면서 궁하게 지냈을 때 만난 사람이라는 해석이 있다). 왕이 못 들은 척 하자 아전은 성을 내며 난을 일으켰다(1010년 12월 29일).’ 같은 날 무졸(武卒)이 화살을 쏘며 행궁(行宮, 왕의 임시 거처)을 범하려고 했다.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왕에게 위세를 부렸다(1011년 1월 8일). 현종에게는 거란이라는 외부의 적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의 위기였다.

현종 지나간 갈재, 신작로와 다른 옛길

호남선 신흥리역 증기기관차 급수탑 내부. 1914년부터 1967년까지 사용했다. 김홍준 기자

호남선 신흥리역 증기기관차 급수탑 내부. 1914년부터 1967년까지 사용했다. 김홍준 기자

1011년 1월 13일, 현종이 갈재를 넘자 거란군이 물러났다는 연락이 왔다. 이상훈 육사 군사사학과 교수는 “거란은 강동 6주를 완전히 점령 못해 후방 보급로가 불안정했고, 현종의 나주 몽진으로 장기전 돌입을 걱정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종은 곧바로 조직개편과 인사를 단행했다. 중대성을 없애고 중추원을 되살렸다. 본인이 없앤 중추원을 2년 만에 복구한 건 회심의 카드다. 중대성은 자신을 옹립한 강조·이현운·채충순이 요직을 꿰찬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하지만 거란 2차 침입 때 포로가 된 강조가 사망하고 이현운이 거란 성종의 신하가 되면서 비대해진 권력기관을 정리한 것이다. 김보광 가천대 자율전공학부 교수는 “중대성은 국왕을 견제하고 감시한 기능도 있었기에 현종은 강조가 죽고 거란이 물러났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환도 중 폐지했다”고 했다.

전남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에 있는 원덕리미륵석불. 근엄한 인상보다는 토속미 넘치는 친근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말이나 조선초로 추정된다. 전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김홍준 기자

전남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에 있는 원덕리미륵석불. 근엄한 인상보다는 토속미 넘치는 친근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말이나 조선초로 추정된다. 전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김홍준 기자

전쟁은 쓸 사람을 가리게 했다. 자신을 몽진 와중에 끝까지 지킨 채충순(비서감 임명)과 지채문(상장군 임명)을 중용했다. 몽진 중 전방에서의 활약으로 거란 철수에 일조하다 전사한 양규의 아내에게 곡식을 주고 아들을 교서랑에 임명했다. 거란에 항복한 유언경의 가족은 유배 보냈다. 마치 깃발을 든 군사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여 장단(長湍, 현재의 파주)에서 거란군의 남하를 막은 감악산 신사에는 보은의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신상필벌이었다.

남행 중 공주에서 자신을 극진히 모신 김은부를 환도 중 다시 찾았고, 딸 셋을 비로 맞이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지방세력을 포섭하려는 정략이었다.

갈재 옛길 고갯마루에는 '장성부사 홍병위 영세불망비'가 새겨져 있다. 홍병위가 장성부사직에서 물러난 임신년(1872년)에 새겨졌다. 김홍준 기자

갈재 옛길 고갯마루에는 '장성부사 홍병위 영세불망비'가 새겨져 있다. 홍병위가 장성부사직에서 물러난 임신년(1872년)에 새겨졌다. 김홍준 기자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갈재로 향하는 도로(갈재로)가 가파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에 있는 목란마을의 바위에는 조선시대 장성 부사를 지낸 관리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김홍준 기자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갈재로 향하는 도로(갈재로)가 가파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에 있는 목란마을의 바위에는 조선시대 장성 부사를 지낸 관리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김홍준 기자

현종이 몽진 종착지 후보지로 전주 대신 나주를 택한 이유는, 후백제에 저항하고 태조 왕건이 왕비 오씨를 맞이한 나주가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보다 우호적이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현종은 이후 지방체제를 개편하면서 나주를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전주가 갖고 있던 목의 지위는 박탈했다.

모든 인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다. 한때 도망쳤던 박섬은 거란이 물러나자 왕을 다시 찾았다. 왕이 그를 중용했다는 기록이 녹록지 않다. ‘…이러한 왕명이 있었으나, 당시 여론이 그(박섬)를 비난하였다(고려사 1011년 1월 29일).’  허 교수는 “의도치 않았지만, 현종은 거란 2차 침입을 계기로 군사·행정상의 어그러진 제도를 바로 잡고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하도록 했으며, 물가도 잡는 등 민심을 자기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면서 명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현종이 이용한 갈재는 조선 시대에 만든 삼남대로 옛길에 있다. 교통의 요충지다. 우암 송시열이 제주 유배 중 국문을 받기 위해 갈재를 넘었다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갈재를 넘은 뒤 나주에서 헤어져 각자의 유배지인 흑산도·강진으로 향했다. 김정희도 유배지 제주로 가면서 갈재를 넘었다. 하멜도 표류한 제주에서 한양으로 향할 때, 동학농민군도 전주로 진격할 때 이 고개를 이용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노령보 고갯길이 사나워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대낮에도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일이 빈번했다’고 적고 있다.

전북 정읍시 입암면 등천리의 옛 호남선 철길을 걷는 이상경씨 부부. 1987년 호남선 복선화로 1914년 만들어진 철길 일부 구간이 사라졌다. 김홍준 기자

전북 정읍시 입암면 등천리의 옛 호남선 철길을 걷는 이상경씨 부부. 1987년 호남선 복선화로 1914년 만들어진 철길 일부 구간이 사라졌다. 김홍준 기자

전북 정읍시 입암면 옛 호남선 철길의 터널. 1987년 호남선 복선화로 철길 일부 구간이 사라지면서 1914년 만들어진 두 개의 터널도 '폐터널'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됐다. 김홍준 기자

전북 정읍시 입암면 옛 호남선 철길의 터널. 1987년 호남선 복선화로 철길 일부 구간이 사라지면서 1914년 만들어진 두 개의 터널도 '폐터널'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됐다. 김홍준 기자

“여기가 갈재 밑 호남선 폐터널입니다.” 정읍시 입암면에서 ‘노령산장’을 운영하는 이상경(67)씨가 길 안내를 해줬다. 현종이 갈재를 넘은 지 900여 년 뒤인 1914년, 고개 밑으로 터널이 뚫리고 호남선 철도가 완성됐다. 제1터널은 길이 321m, 제2터널은 945m다. 제2터널 바로 위가 현종이 넘었던 옛 갈재 고갯마루다.

다시 100여 년 뒤 2023년. 고속열차가 장성갈재 밑으로 달려 들어간다. 1000년간 있어 왔거나 새로 생긴 옛길과 신작로를 오갔고, 국도 제1호선과 734도로, 708도로를 달렸다. 그리고 호남선 고속철도에 올랐다. 건너편 호남고속도로에서 큰 사고가 났고 호남선 철도로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왕이 지나고 도둑이 들끓었던 고개로 난 8개의 길은 이래저래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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