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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軍 안가려 꾀병 부렸지?"…진짜 뇌전증 환자 덮친 공포

중앙일보

입력

“나더러 ‘XX하고 자빠졌네’라고 한다. 맞다. 많이 넘어졌다. 그런데 그게 내 탓은 아니지 않나. 병역 판정을 위해 자료를 수백장 준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도대체 우릴 어디까지 내몰려고 하나.”

지난 2021년 2월 17일 수원시 팔달구 경인지방병무청에서 입영 대상자들이 신체검사를 받고 있다. 경기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지난 2021년 2월 17일 수원시 팔달구 경인지방병무청에서 입영 대상자들이 신체검사를 받고 있다. 경기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뇌전증을 앓고 있는 편모(28)씨가 4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한 말이다. 편씨는 뇌전증 때문에 병역 판정 검사 당시 전쟁 상황에만 동원되는 5급 전시근로역으로 분류됐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발작 증상 때문에 하루하루가 불안한데, 최근엔 뇌전증을 가장해 병역 면탈을 도운 브로커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며 2차 가해의 공포가 더해졌다. 그는 “남의 고통을 악용하는 일은 제발 없었으면 한다”고 되뇌었다.

편씨에게 처음 발작 증상이 나타난 건 지난 2006년. 뇌전증이 아직 ‘간질’, 속된 말로 ‘지랄병’으로도 불리던 때다. 학습지를 풀던 중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 이후, 다시는 그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지 못했다.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불쑥 찾아온 발작 증상이 계속 편씨를 괴롭혔다.

2017년엔 대학교 전공 시험을 준비하다 잠시 머리를 식히려 도서관 밖에 나왔는데 그대로 쓰러졌다. 오전 11시 시험을 단 30분 앞두고 병원에서 눈을 뜬 그는 허겁지겁 강의실로 질주했지만, 시험지를 제대로 보기조차 어려웠다. 또 한 번은 버스에서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 발작 증상이 나타났다. 눈을 떴을 때, 버스는 종점에 도착해있었다.

뇌전증 치료제 중 하나인 데파코트 서방정. 뇌전증 환자인 편씨는 4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신경에 작용하는 약이라 일부 부작용이 있지만 증세 호전을 위해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며 ″뇌전증은 검증이 어려워 병역 심사를 할 때 복약 기록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말했다. 사진 편모씨

뇌전증 치료제 중 하나인 데파코트 서방정. 뇌전증 환자인 편씨는 4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신경에 작용하는 약이라 일부 부작용이 있지만 증세 호전을 위해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며 ″뇌전증은 검증이 어려워 병역 심사를 할 때 복약 기록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말했다. 사진 편모씨

입대를 앞두고 병역 판정 검사를 준비하던 몇달을 편씨는 ‘전전긍긍’이란 네 글자로 회상했다. 발작 증상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 약을 먹는 동안에는 한눈에 알아볼 만큼 몸이 안 좋거나, 증상이 드러나지 않는다. 편씨는 그간의 진료·검사 기록과 약 복용 내역 등을 수백장 분량 준비해 병무청에 제출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병을 증명하는 과정은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5급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군 복무를 마친 사람들이 신나서 한다는 ‘군대 얘기’만 나오면 움츠러들었다. 누군가 군 면제 사유를 물으면 “십자인대 파열”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다른 뇌전증 환자 심모(31)씨는 “병역 비리가 터지면서 ‘사실 너도 군대 갈 수 있었는데 꾀병 부린 것 아니냐’고 물을까 겁난다. 2차 가해가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뇌전증 환우 모임 대표인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뇌전증 환자 대부분은 군대에 정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며 “군 면제가 평생 낙인이 될까봐 걱정돼서 열심히 노력하고 관리해 겨우 군대에 가는 환자도 많다. 이런 병을 수단 삼아 병역 비리를 저지르는 건 해도 너무하다”고 한탄했다. 실제 심씨는 운전면허 취득이나 취업 등에서 불이익을 받진 않을지 걱정돼 약물로 꾸준히 증상을 관리했고, 지난 2012년 현역으로 육군 복무를 마쳤다.

서울남부지방검찰청 모습. 뉴스1

서울남부지방검찰청 모습. 뉴스1

김덕수 한국뇌전증협회 사무처장은 “지난달 직업군인 출신 병역 브로커가 구속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이후 많은 환자들이 실제로 불안에 떨고 있다”고 했다. 병역 판정 검사를 준비하던 뇌전증 환자들에게 영향이 있진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 환자 커뮤니티엔 “나는 성인이 돼 증상이 나타났는데, 병역 브로커 때문에 뇌전증 판단이 까다로워질 것 같아 걱정된다” 등의 글도 올라온다. 김 사무처장은 “약을 먹으면 대부분 증세가 호전되지만, 사람에 따라 한 해에 한 두 번은 발작이 발생할 수 있다”며 “수류탄이라도 들고 있다가 발작이 나타나면 그땐 어쩔 건가. 이번 일 때문에 뇌전증에 대한 판정 기준이 높아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원철 강동경희대병원 신경과 교수도 “안 좋은 시선 때문에 병을 숨기는 등, 군대에 가선 안 되는 환자들이 무리해서 입대했다 크게 다치는 사례도 꾸준하다”며 “이번 일로 기준이 불합리하게 바뀌거나, 2차 가해를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편 병역 비리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남부지검·병무청 합동수사팀은 의사·법조인·고위공직자 자녀들과 프로축구 K리그 주전급 선수 등이 연루된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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