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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신분제 조롱한 붓끝, 끝내 못다 핀 ‘하늘이 내린 괴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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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홍길동전’ 허균 집안의 비극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나와 내 누이의 글을 챙겨 훗날을 도모해다오!” 역적 누명을 쓰고 형장으로 가는 허균(1569~1618)이 딸과 사위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이다. 허균은 역사에 다시 없는 ‘괴물’로 목이 잘리고 몸이 찢어진 주검이 되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을 딸에게 못다 한 꿈을 맡겼다. 아비가 역모 죄인이라 하더라도 시집간 딸의 경우는 목숨까지 내놓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이니만큼 그 죽음 또한 혁명과 반역을 넘나들며 소설 같은 여운을 남겼다.

가족은 날개인가, 굴레인가

조선시대는 개인의 흥망성쇠가 가족과 연동되고 부모와 조상을 통해 내 존재가 설명되는, 모든 길은 가족으로 통하는 사회였다. 물론 그 내부는 적서(嫡庶) 차별로 인해 가족이 날개인 사람과 가족이 굴레인 사람으로 나뉜다. 허균은 양반의 적자이지만 서자의 설움을 알았고, 신분의 족쇄에 걸린 유능한 인재를 안타깝게 여겼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이록(利祿)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는’ 선현들을 붓끝으로 조롱하면서 특권의식에 도취된 양반을 비웃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적 특권을 누리기보다 넘어서고자 했던 그를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괴물(天生一怪物)’이라 했다.

조선시대의 문장가로 꼽히는 허균의 표준 영정. 유교국가 조선에서 허균 집안은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조선시대의 문장가로 꼽히는 허균의 표준 영정. 유교국가 조선에서 허균 집안은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이러한 허균의 자신감은 가족이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누나 허난설헌(1563~1589)은 중국의 문사들도 열광한 천재 시인 아니던가. 가족에서 얻는 행복과 가족이기에 받는 고통이 오늘날의 상황과 오버랩되는 그의 가족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으며 연재를 시작한다.

양반 적자임에도 특권층 비웃어
역모 혐의로 숨진 시대의 반항아

누이 난설헌 등 ‘허씨 5문장’ 명성
유·불·선 넘나드는 자유로운 가풍

붕당정치·임란에 일가 모두 희생
음모·조작의 연속극, 지금 우리는?

어린 기억 속의 그는 세상의 버릇없는 막내들과 다를 바 없는 부모와 형제자매의 사랑을 독차지한 응석받이였다. 아버지 허엽(1517~1580)이 53세에 낳은 늦둥이에 형들과의 나이 차는 무려 스무살이 넘었다. “열두 살 때 엄친을 여의었는데, 어머니나 형님들은 나를 어여삐 여기고 사랑만 하여 공부를 재촉하지 않았어요. 좀 더 자라서 과거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그들을 따라 육경(六經)과 역사서를 두루 읽기 시작했지요.”(‘답이생서, 答李生書’)

유성룡·이순신 집안과 교류

강원도 강릉 경포호수 남쪽에 조성된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강원도 강릉 경포호수 남쪽에 조성된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아버지 허엽은 두 번의 결혼으로 3남 3녀의 자녀를 얻는다. 전처 청주한씨와의 사이에 박순원의 아내가 된 장녀와 우성전의 아내가 된 차녀 그리고 아들 허성을 두었고, 후처 강릉김씨와의 사이에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두었다. 전처 아들 ‘성’과 후처 아들 ‘봉’이 세 살 터울인 것을 보면 3년 사이에 출산과 사별, 재혼과 출산이 이루어졌다. 급박하게 돌아가던 가정사와는 별개로 당시 허엽은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맡아 정사(政事)에 몰두하는데, 바깥일 하는 양반은 집안일에 무심해야 하는 것이 남녀유별의 정신이고 내외지분의 법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허균 일가의 무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허균 일가의 무덤.

허엽과 김씨의 혼인은 당시 예조참판이던 김광철이 전도유망한 젊은 동료를 사위로 낙점함으로써 성사되었을 것이다. 정승인 그가 아이 셋 달린 자리에 딸을 시집보낸 것은 양반관료 사회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즉 혼인은 가문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어린 사윗감의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이미 급제하여 보장된 재취 자리가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실제로 초혼에서는 별 볼 일 없다가 재혼을 통해 더 왕성해진 가문이 셀 수도 없이 많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의 묘. 아들 균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묘표가 부러지는 화를 당했다. 묘표 뒷면에는 균의 이름이 지워져 있다. 오른쪽 묘표는 허엽의 후실이자 허균 남매의 생모 강릉김씨의 것인데 봉분이 없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의 묘. 아들 균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묘표가 부러지는 화를 당했다. 묘표 뒷면에는 균의 이름이 지워져 있다. 오른쪽 묘표는 허엽의 후실이자 허균 남매의 생모 강릉김씨의 것인데 봉분이 없다.

허엽의 본가는 한성 건천동(현재 인현동)에 있었다. 두 아들 허성과 허봉의 동네 형으로 류성룡과 이순신이 살았다. 특히 류성룡은 허씨 가족들과 각별했는데, 그 집 사위 우성전은 벗이었고, 그 집 막내 허균은 제자였다. 훗날 류성룡은 허균이 들고 온 『난설헌시고』와 우성전의 아내 허씨가 보내 온 『계갑일록』, 그리고 허봉의 『하곡집』 등 허씨 가족들의 문집에 추천사를 쓴다. 생활 공간 건천동이 허씨 가족들에게는 역사적 무대가 된 셈이다.

아버지 허엽의 폭넓은 세계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표준 영정. 허난설헌 또한 빼어난 문인이었다.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표준 영정. 허난설헌 또한 빼어난 문인이었다.

한편 김씨 소생의 세 남매는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서울 본가에서 자랐다. 훗날 전라도를 여행하던 허균은 고부(古阜)에서 이우(李瑀)를 만나는데,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씨 어른은 율곡 선생의 아우이시다. 내게는 고향의 어른이 되는데 시와 그림과 글씨를 모두 잘하여 존경하는 분이다.”(‘조관기행, 漕官紀行’) 외가 강릉을 고향으로 여긴 것은 동성 촌락이 형성되기 전의 정서이다.

“형님들이나 누님의 글은 가정에서 나왔다”고 한 허균의 말을 보면 가족이 곧 교학(敎學)의 공간이었다. 유교는 물론 불교·도교와도 왕래한 허엽의 폭넓은 지식 세계는 아들과 딸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난설헌이 선계(仙界)에서 노니는 자유 정신을 그린 것이나 허봉과 허균이 불교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은 것에서 그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허균은 “중형(仲兄)이 적소(謫所)로부터 돌아와서 비로소 고문(古文)을 가르쳐 주셨고” “젊었을 때 중형의 명으로 손곡 옹에게 시를 물어 방향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

허균의 아버지 허엽

허봉은 당시(唐詩)의 대가 손곡 이달(李達)을 교사로 모셔올 만큼 두 동생의 교육에 지성이었다. 그는 또 시집간 누이가 시작(詩作)에 게으를까 수시로 격려하며 “두보의 명성이 내 누이에게서 다시 일어나기를” 염원한다. 세상은 그들을 ‘허씨 5문장’이라 불렀는데, 허엽과 그 자녀 성·봉·난설헌·균을 가리킨다. 게다가 두 사위 우성전과 김성립까지 여섯이 문사로 조정에 올라 서로의 수준을 높였는데, 세상에서는 허씨 파를 가장 치성한 가문으로 쳤다. (『선조수정실록』 13년(1580) 2월 1일)

즐거움도 고통도 공유한 형제들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 허씨 가족은 서로가 겪는 수난과 고통도 자기 일인 양 아파했다. 허봉은 네댓 살 먹은 누이의 아들이 죽자 극진한 슬픔을 기록으로 남겼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인 아이는 희윤이다. 희윤의 아버지는 성립인데, 나의 매부다. 희윤의 할아버지는 첨(瞻)인데, 내 친구다.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짓는다. 해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희윤묘지, 喜胤墓誌’)

허씨 가족은 동서 분당의 정치적 갈등과 임진왜란의 직격탄을 맞으며 쇠락해간다. 동인에 속한 허봉은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살아 돌아오는 자가 드물다는 갑산 유배에 처해졌다. 여동생 난설헌은 그 안타까움을 시에 담아 “멀리 갑산으로 귀양 가는 나그네”를 위로하고, “변방의 소식 뜸하니 이 시름 풀 길이 없는” 극한의 슬픔에 빠진다. 허봉은 2년여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38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듬해에는 난설헌이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죽이고, 또 죽이는 역사의 질곡

허균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홍길동전’의 19세기 판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허균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홍길동전’의 19세기 판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가족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허균은 피난길에 아내를 잃었고, 의병 간 두 자형 우성전과 김성립도 세상을 떴다. 이즈음 허균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과격한 언사를 남발하여 구설에 오르기도 하는데, 맏형 허성이 정서적 언덕이 되어 주었다. 허균은 “헤어진 지 3년 만에 형님을 만나 너무 기뻤고 한 이불을 덮고 잤다”며 자랑하는가 하면, “형님이 내 생일상을 차려주었다”며 좋아한다. 각자가 남긴 기록의 조각을 모아보면 허균의 형제자매들은 적어도 장유유서의 엄격함이나 가문의 외형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족애를 바탕으로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지만 역적이 된 허균으로 인해 아버지는 무덤이 훼손되고 형과 누이는 역사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조작과 음모로 죄가 만들어지고 상하좌우 모든 가족을 죽이고 다시 죽이는, 이런 형태는 물리고 싶은 역사이다.

공초(供招) 기록을 보면, 허균 사건은 영의정 기자헌이 폐모 문제로 위기에 몰리자 그 아들 기준격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이 임금을 해칠 모의를 한다”는 고변에서 시작된다. 허균에게 글을 배울 때 역모의 조짐을 보았다는 것이다. 치열한 공방 끝에 허균 가족은 결국 역적의 씨를 배태한 “본래 패려궂은 집안”으로 단죄된다. 그런데 승리한 기씨 부자가 “본디 흉악하고 음흉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이숙인=성균관대 동양철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중국 고대 유교경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했다. 근래에는 여성과 가족으로 조선시대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또 하나의 조선』 『정절의 역사』 『동아시아고대의 여성사상』 등을 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