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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맥주, 김밥, 그리고 시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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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동양과 조선. 이들은 20세기 후반 한반도를 분할 점거했던 보리 제국들이다. 각각 오비와 크라운이라는 이름의 맥주로 밤의 회식 세계를 평정했다. 그런데 20세기 전반에 이들의 이름은 달랐으니 기린과 삿포로였다. 일본 자본의 맥주회사가 적산으로 접수되었다가 불하된 것이다. 우리의 맥주는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도시를 답사하다 보면 곳곳에 박혀있는 적산가옥들을 만난다.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는 건물들인지라 마주치면 반가워진다. 그런데 이들을 만나면 항상 드는 질문이 있다. 저 건물의 원주인은 패망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패망은 집합적으로 국민의 몫이었을까. 그들의 개전은 국민투표의 합의를 거친 것이었을까. 빈 건물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주인을 만나게 되었을까. 대체적인 답은 혼란기의 점거 혹은 불하였다.

일제강점기를 조선총독부 수탈이라는 안경으로만 보면 저해상도의 흑백 사진만 얻게 된다. 한반도는 일제강점기에도 지금의 한국처럼 복잡한 사연이 다층적으로 얽힌 곳이었다. 조선은 일본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수많은 민간인의 이주와 투자가 있었다. 거기에는 하층민들도 당연히 대거 끼어있었으니 이들은 조선 거리에서 인력거를 끌기도 하고 유곽에서 몸을 팔기도 했다. 나중에 적산가옥이라고 불명예스럽게 불릴 주택들도 지었다.

보존하겠다던 청주시 기존 청사
시장 바뀌자 철거로 방침 바꿔
일본 흔적이라 철거한다는 논리
역사 퇴적 없는 부동산 공화국

핵폭탄 투하 이후 미군정은 한반도의 일본 민간인 재산까지 자신들에게 귀속시킨다고 선언했다. 패전 이후 일본인들은 투자한 부동산을 모두 두고 조선을 떠났다. 그 유산은 한국 정부가 받았고 결국 한국인들에게 불하되었다. 한국 정부는 그 민간 재산을 원소유자들에게 보상한 적이 없다. 그냥 과거사로 덮어두기로 한 것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크게 덧나는 게 한일관계의 상처다. 갑자기 더 불거진 상처에 강제징용과 위안부 보상이 있다. 진정한 사과가 필요하다고 썼으나 그 사과는 결국 금액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이 상처의 해결방법이 궁금해지는 것은 같은 잣대의 반대쪽에 민간인 적산처리의 문제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상처는 누가 긁었을까. 심지어 불가역적이라 약속한 위안부 합의를 뒤집은 것은 명확히 한국 정부다. 피해당사자와의 합의가 없었다는 것이 근거였다. 다퉈야 할 대상이라고 마음먹은 것은 일본인지 이전 정권인지 모른다. 그래서 피해의식을 지피고 내부 결속에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얻게 된 상처는 국제적 오명이다. 믿을 수 없는 국가. 오명은 국민이 뒤집어썼다.

이번에는 지자체에 탈이 붙었다. 청주시는 시청사 신축의 대대적인 국제현상공모를 개최했다. 기념비적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설계했던 노르웨이 건축가 집단의 제안이 당선되었다. 그런데 익숙한 풍경이 벌어졌다. 새로 당선된 지자체장이 사업 백지화를 선언한 것이다. 보존하기로 했던 기존 청주시청사 철거를 전제로 사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 익숙하고도 진부한 근거가 제시되었다. 건물이 낡아 안전상 문제가 있고 왜색 건물이라는 주장이다.

왜색 주장의 내용은 이렇다. 1965년 준공된 이 건물의 건축가가 일본에서 공부하였으며 옥탑은 후지산, 로비 천장은 욱일기를 형상화하였고 난간은 일본전통구조를 따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근대건축가의 건축양식을 답습한 것이니 철거하여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문화재청이 존치를 일방 강요하였으니 존치의 사회적 합의가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당만 뒤집혔고 논리의 틀은 똑같다.

그래서 싹 철거하면 새 청사를 더 싸게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건 인간이 삭제된 부동산 절대주의 건축관이다. 기존 청주시청사를 설계한 건축가에게 이 건물은 인생의 한 부분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이 굴레가 되어야 한다면 앞으로는 김밥에 박힌 단무지도 다 빼내야 한다. 나중에 왜색이라고 낙인찍힌 난간도 성실히 시공해낸 시공자가 있었다. 거기 보이는 꼼꼼함은 이 건물이 그에게도 한낱 밥벌이 현장은 아니었다는 증명이다.

건물은 다만 회색 콘크리트 구조체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염료를 뿌리고 관찰하면 건물에 묻어있는 사람들의 기억이 다채로운 색채로 드러난다. 그 기억으로 건물은 아름다워지고 도시가 애착을 얻는다. 도시는 백화점 진열장이 아니고 도서관 서가와 같아야 한다. 시간이 쌓은 인간의 가치와 존재의미가 도시에 퇴적되어야 한다. 철 지나면 내버리고 새로 싸게 만들면 좋다는 부동산 공화국. 믿을 수 없는 국가. 왜 오명은 항상 국민의 몫인가.

그간 곳곳의 지자체장들이 오래된 공공건물에 사형선고를 내려왔다. 고작 임기 몇 해 선출직들의 불가역적 직권남용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건물을 고쳐 놓으면 사진과 커피에 굶주린 인파가 쇄도하는 세상이다. 부산은 심지어 피난기의 궁핍을 자산으로 삼겠다며 피난민촌의 흔적을 찾아내고 나섰다. 한국은 이제 그런 정도의 여유는 가진 사회가 되었다. 적산가옥 개조한 맥줏집에서 당적이 달라도 이전 지자체장의 업적도 흔쾌히 덕담해주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