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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치팅 의혹이라는 유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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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알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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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바둑은 새로운 도약을 맞았다. 신진서 9단이 무적의 일인자로 세계바둑을 호령했고 최정 9단은 여자 최초로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에 올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신진서는 삼성화재배와 LG배, 국수산맥에서 우승했고 국가대항전인 농심신라면배에서 막판 4연승으로 한국우승을 결정지었다. 국내에서도 7관왕에 오르며 최다상금 기록도 새로 썼다. 이런 신진서가 연말 바둑대상에서 MVP가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축제 무드의 세밑, 정체를 알기 힘든 유령 하나가 바둑 동네에 나타났다. 그 시작은 지난달 21일 벌어진 춘란배 세계선수권 4강전, 신진서 대 리쉬안하오의 대결이다. 27세의 리쉬안하오는 중국 랭킹 20위권에서 불과 6개월 만에 2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1위 커제와는 간발의 차이. 상승세가 대단했다.

온라인으로 벌어진 대국은 리쉬안하오의 완승으로 끝났다. 대국을 중계했던 김진휘 6단은 “명국입니다. 이 세상 바둑이 아니에요”라며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처럼 난해한 바둑에서 인공지능(AI) 일치율이 무려 85%입니다. 의혹이든 극찬이든 사람이란 생각은 영 안 드네요.”

AI 일치율이 70%를 넘으면 최상급이다. 김진휘는 “인간계는 졸업입니다” 등의 표현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의문을 표시했다.

중국은 환호했다. 1년 내내 신진서에게 밀렸는데 연말 리쉬안하오가 중국 주최 세계대회에서 감격스러운 선물을 가져다준 것이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 의외의 곳에서 사건이 터졌다. 대결을 지켜보던 중국의 양딩신 9단이 정식으로 AI 치팅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리쉬안하오는 홍황류 소설에 나오는 성인급, 나와는 몇십단 차이가 난다. 부끄럽구나. 지금부터 나는 하늘을 이고 자유자재로 서겠다”고 뭔가를 암시하더니 22일 새벽 ‘20번기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20번기를 두자. 화장실에도 가지 말고 모든 신호를 차단하자. 만약 내가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것으로 드러나면(내가 진다면) 나는 은퇴하겠다. 이 글에 답하라.”

양딩신은 현재 중국 5위. 지난해엔 2위였다. 점잖기로 소문난 양딩신으로서는 참으로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커제와 렌샤오가 여기에 동조했다. 천야오예 9단은 “양딩신, 나는 너를 지지한다. 내가 느끼기에도 진짜 실력이 아닌 것 같다”고 썼다. 증거는 없다.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증폭됐다. 거대한 유령처럼 중국을 휩쓸고 한국에서도 온갖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감시해도 모스부호로 밖에서 착점 위치를 알려줄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사자인 리쉬안하오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양딩신은 리쉬안하오가 AI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본다. 커닝했다고 본다. 하지만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온라인 대국도 대면 대국처럼 감시가 철저하다. 심판이 곁에 있고 화장실에 오고 갈 때도 전자기기로 검색을 한다. 휴대폰은 소지할 수 없다.

다만 많은 프로기사들이 AI 일치율 85%는 인간계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내심 동조한다. 증거는 없다.

프로기사에게 치팅 혐의는 치명적이다. 신의 경지에 가기 위해 악마와 계약한 파우스트 박사와 같다. 그러나 리쉬안하오가 결백하다면 이것보다 억울한 경우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결백이 밝혀지더라고 상처는 돌이킬 수 없다.

중국바둑협회는 사건 며칠 후 “조사와 면담 끝에 부정행위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동시에 양딩신에게 각서를 받고 ‘6개월 출전 정지’라는 징계를 내렸다. 동조했던 다른 기사들도 징계를 받았다는 얘기가 들린다. 일단 이렇게 봉합됐다.

바둑의 신이 된 AI는 인간에게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가져왔다. 이번 사건은 AI로 인해 바둑기사들의 생태계가 파괴된 케이스다. 앞으로 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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