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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누비는 여성 지휘자 성시연 “기술보다 중요한 게 존재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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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거장 '마에스트라'의 길을 걷는 지휘자 성시연. 7일 예술의전당에서 KBS 교향악단과 함께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슈베르트의 '아다지오'를 세계 초연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여성 거장 '마에스트라'의 길을 걷는 지휘자 성시연. 7일 예술의전당에서 KBS 교향악단과 함께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슈베르트의 '아다지오'를 세계 초연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극적인 건 좋지만 감정 과잉은 안 돼요. 비브라토를 줄이고 좀 더 드라이하게 갑시다.”

교향악으로 편곡한 슈베르트 ‘아다지오’ 7일 세계 초연 #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니아 수석 객원 지휘자 곧 데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로열 필하모닉 재초청 지휘 #"지휘자는 존재 만으로도 단원들을 이끌 수 있어야"

2일 KBS교향악단 여의도 연습실. 단원들에게 지휘자 성시연(47)이 주문했다. 슈베르트의 ‘아다지오’. 현악 5중주 2악장을 작곡가 박혜진이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한 작품이다. 7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대원문화재단 신년음악회에서 세계 초연을 앞두고 있다. 이승과 저승을 자유롭게 넘나든 슈베르트 만년의 작풍대로 부유하는 평온함과 울부짖는 격정이 교차한다. 강렬함의 톤을 줄여 애달픈 심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성시연의 얼굴이 땀에 젖는다.

KBS교향악단 지휘는 3년 만이라는 성시연은 “잉키넨 음악감독 부임 이후 단원들의 뛰어난 역량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라벨 ‘볼레로’에서 스네어드럼과 관악기들이 분위기를 고조시킬 때 즐기면서 연주하더군요. 슈베르트는 새로운 편곡이라 낯설지만 무대에 올려지면 새로운 시각과 감정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새해를 시작하기에 어울리는 곡이죠.”

성시연은 지난해 10월 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됐다. “캐나다·호주 출신 단원들이 많고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오케스트라”라고 소개한 성시연은 “두 차례 지휘하며 ‘케미’가 잘 맞아서 좋아했었는데 오케스트라에서 제의해 기뻤다. 보수적인 분위기인데 말러를 비롯해 새로운 음악을 많이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클랜드에서 3년 임기의 수석 객원 지휘자를 개시하는 첫 작품은 독일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다. 오는 9월 KBS교향악단과 예정된 정기공연에서도 지휘한다.

2021년 네덜란드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잇달아 지휘한 성시연은 지난해에는 영국 로열 필 포디움에 섰다. 반응이 좋다. 바이에른은 올해, 로열 필은 내년에도 초청받았다.

“좋은 오케스트라일수록 단원들이 지휘자의 음악적인 영감을 더 요구합니다. 콘세르트허바우 단원들은 저와 시선을 맞추며 경청하더군요. 리허설 땐 울림이 심했는데 관객이 차니 아름다워진 음향도 기억나요. 뮌헨 헤라클레스 홀에서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원색적이면서 격조 있는 사운드를 거침없이 내서 놀랐습니다. 로열 필은 연주 당일 3시간만 리허설했는데 요구사항을 착착 이행하는 게 인상적이었죠.“

성시연에겐 세계적인 교향악단 지휘 의뢰가 잇따라 들어온다. 지휘자로서 대성하기 위한 요건을 묻자 "기술보다는 지휘자 자신의 존재감인 것 같다"고 했다. 사진 클래식엔

성시연에겐 세계적인 교향악단 지휘 의뢰가 잇따라 들어온다. 지휘자로서 대성하기 위한 요건을 묻자 "기술보다는 지휘자 자신의 존재감인 것 같다"고 했다. 사진 클래식엔

성시연은 초등학교 때까지 아버지 직장 때문에 부산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바다와 부산시향의 연주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던 성시연의 진로를 바꾼 건 푸르트벵글러의 지휘 영상과 아바도의 연주였다.

“학생 표가 저렴해 음악회를 많이 다녔어요. 아바도 지휘 베를린 필의 리허설과 연주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죠. 푸르트벵글러가 단원들의 세포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서 거대한 음악으로 만드는 영상을 보고 지휘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봤다. 지휘자가 되는 게 가능할지. 대부분 말렸다. 이미 나이가 많고 앞으로 시간도 많이 걸린다고. 여자가 하기 어려운 직업이라고도 했다. “인생이 70년이면 2~3년 공부는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는 어느 지인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는 성시연은 “이렇게 힘든 일인 줄 그때 알았다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막상 지휘를 하려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피아노 공부를 끝내지도 않았는데 시험부터 다시 봤다. 독학으로 스코어 보는 법을 익히며 한스 아이슬러 대학 지휘과에 합격했다. 성시연은 “음악을 숭고하게, 종교처럼 생각하라”던 롤프 로이터 교수의 가르침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숄티 콩쿠르 우승과 말러 콩쿠르 1위 없는 2위 등 잇단 지휘 콩쿠르 입상의 비결을 묻자 “굴하지 않는 성격 덕분”이라고 했다. “숄티 콩쿠르 때 저만 학생이라 주눅이 들더군요. 2차에서 스트라빈스키 ‘불새’를 연주할 때 앙상블이 꼬여서 트럼펫이랑 어긋났는데 금관 주자들끼리 비웃듯 떠드는 거예요. 화가 나서 정색을 하고 다시 처음부터 하자고 단호하게 얘기했죠. 두 번째는 잘 됐어요. 지휘자의 음악적 아이디어가 반대에 부딪히면 설득해야 돼요. 여기서 쉽게 포기하면 단원들에게 존중 못 받죠. 자기 생각을 관철하는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피아노는 한 번 실수하면 아웃인데 지휘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중요하죠.”

성시연은 기술도 중요하지만 지휘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존재감’이라 했다. 특히 보스턴 심포니 부지휘자 시절 대가들의 리허설과 연주를 참관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깨달았다고 했다.

“하이팅크 선생님이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를 리허설할 때 별말씀이 없으셨어요. 지휘봉을 딱 드시니까 유럽에서 듣던 소리로 바뀌더군요. 아무런 얘기 없이 그 존재 만으로요.”

성시연의 새해 목표는 ‘본질에 충실한 연주’다. 과거엔 외적인 면을 중시했는데 팬데믹을 겪으며 본질에 더 집중하게 됐다고 했다. “피상적인 음악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올해는 한국 연주가 몇 차례 있어서 우리나라 청중과 만날 수 있어 기쁩니다.”

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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