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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큰 정부’는 ‘냄비 여론’과 불평불만을 먹고 자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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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규제 vs 시장』 신간 낸 최병선 전 규제개혁위원장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연말연시를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코우즈와 규제에 대한 묵직한 책을 뒤적이며 보냈다. 최병선(70)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의 신간 『규제 vs 시장』이다. ‘시장을 알아야 규제가 보인다’는 부제가 붙은 책은 500쪽이 넘는다. 시종일관 “시장에 대한 악의적 프레임”에 날선 비판을 날린다.

최 교수는 행시 18회로 전라북도 도청과 상공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유학을 떠나 미국 하버드대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규제학회 창립을 주도해 초대 회장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2009년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을 맡았다.

책의 시작이 특이하다. 레너드 리드의 ‘나, 연필’이라는 짧은 글을 번역해 소개했다. 주인공 연필의 시점에서 연필 생산에 지구촌 수십만 명의 지식과 노하우가 ‘자발적으로’ 어떻게 연결되고 이용되는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이 글 1976년판 후기에서 “나는 이제껏 이렇게 간명하고 설득력 있게, 효과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말하는 ‘분산된 지식과 정보의 전달수단’인 가격 시스템의 역할과 의미를 잘 묘사해준 문헌은 본 바가 없다”고 극찬했다.

평소엔 공무원 비효율 비판하다가
사고만 나면 ‘정부는 뭐하냐’ 질타

규제, 국민이 부담할 ‘숨겨진 세금’
한국 규제비용 GDP 15%는 될 것

정부 ‘정치적으로 편해’ 규제 선호
규제 획일성과 경직성이 실패 불러

자애롭고 유능한 정부는 없다

최병선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전 규제개혁위원장)가 2일 서울 강남구 자곡동 자택에서 포즈를 취했다. 2018년 정년퇴임하고 4년간 『규제 vs 시장』을 썼다. 최 교수는 “필생의 저작”이라고 자평했다. 김현동 기자

최병선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전 규제개혁위원장)가 2일 서울 강남구 자곡동 자택에서 포즈를 취했다. 2018년 정년퇴임하고 4년간 『규제 vs 시장』을 썼다. 최 교수는 “필생의 저작”이라고 자평했다. 김현동 기자

최 교수는 시장은 불완전하지만 그렇다고 시장 실패가 정부 개입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자애롭고 유능한 정부’라는 가정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정부는 만능 해결사가 아니다. “평소엔 정부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무사안일, 비효율을 탓하다가, 사건·사고만 나면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질타하는 이중적 사고는 이제 멈춰야만 한다”고 했다. ‘큰 정부’는 이런 불평불만·한탄·탄식을 먹고 자라며, 냄비처럼 들끓는 언론 보도와 여론은 ‘큰 정부’의 산모요, 보모(保母)라고 꼬집었다.

규제는 ‘숨겨진 세금’이다. 규제를 이행하는 데는 비용이 들고 결국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 정부는 돈이나 말로 일한다. 돈은 세금이다. 말은 권위가 실려 있고 법적 강제력이 담보된 규제를 가리킨다. 정부는 세금보다 규제를 선호한다. “정치적으로 쉽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규제비용이 잘 드러나지 않아 반발이 적고, 국민도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효과가 있다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국회의 복잡한 예산과정을 거치기보다 민간 위에 군림하면서 목에 힘(?)도 줄 수 있는 규제가 관료들에게 더 매력적”이라는 이유도 있다. 규제는 세금보다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 면에서 매우 열등하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그래서 선진국은 세금이 많고 규제가 적은 편이며 후진국은 그 반대라고 했다. 최 교수 얘기를 좀 더 들어봤다.

규제로 인한 국민경제 비용이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10%라고 했다. 2020년 미국 GDP가 20조 달러니, 미국 국민이 해마다 2조 달러(2400조원)의 규제 비용을 부담한다. 한국은 어느 정도인가.
“그런 수치가 한국에선 계산된 적 없다. 다만, 우리나라는 규제가 많고 규제의 불합리성이 미국보다 높다는 점에서 GDP의 15%선은 되지 않겠나. 그냥 추정이다. 2020년 GDP로 계산하면 규제비용이 연간 300조원이다. 2020년 국민 1인당 조세 부담액이 1019만원인데, 규제비용으로 국민 1인당 588만원을 부담하는 셈이다.”
규제영향 분석을 강조했는데.
“우리나라도 1998년 도입했지만 여전히 형식에 그치고 있다. 난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금전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사항이 많아서다. 하지만 규제 합리화와 품질 제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경제학자 90%는 개입주의자

최 교수의 『규제 vs 시장』. 표지사진 위는 코우즈, 아래는 하이에크.

최 교수의 『규제 vs 시장』. 표지사진 위는 코우즈, 아래는 하이에크.

후생경제학에서도 시장원리에 맞는 정부 개입을 얘기한다. 너무 비판적인 것 아닌가.
“세상을 보는 눈은 배워서 생기지 않는다. 경제학자의 90%는 정부 개입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시장을 알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김영삼 정부 시절, 교통부(현 국토교통부) 항공정책심의위원회에서 새 방식으로 항공노선 배분을 했던 경험을 책에 썼던데 흥미롭다.
“시장 유인을 활용하는 배분 방식을 제안해 채택됐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에 각각 1000개와 600개의 칩(chip)을 주고 각사가 선호하는 노선에 우선적으로 칩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노선 배분 문제가 단칼에 해결됐다. 양사가 진실로 원하는 속마음, 즉 선호가 자명하게 드러났다. 안타깝게도 정권이 바뀌자마자 노선 배분 방식이 예전으로 돌아갔다.”
왜 그랬을까.
“글쎄. 관료 입장에선 항공사들이 굽실대고 아양 떠는 예전 관행이 좋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이명박 정부에서 규제개혁위원장을 했다.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나.
“행정학자이고 공무원 생활도 5~6년 해서 공직사회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안 돌아갔다. 필요한 인력과 예산을 더 달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안 통했다. 그래도 악성 규제가 생기는 걸 많이 막았다. 그런데 그런 건 신문에 안 나고, 정부가 규제를 만들 때만 뉴스가 됐다. 2년 더 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동반성장 얘기 나오면서 더 이상 규제개혁은 어렵겠다고 판단해 그만 뒀다.”

“정부 의도 선해 보일 때 가장 경계해야”

규제 유형을 재분류해서 정리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기존 분류는 중소기업 등 경제 약자와 소비자를 보호하는 경제규제와 환경·노동 등의 사회규제가 있다. 경제규제는 대체로 시장원리에 반하지만 정치적 지지가 강하고, 사회규제는 국민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계속 강화되는 추세다. 경제규제는 폐지나 완화가 답이고, 사회규제는 합리화 대상이라는 게 교과서적 처방이지만 잘 작동하진 않는다.

저자는 투입요소기준 규제와 성과기준 규제, 경제유인 규제와 시장기반 규제 등으로 규제 유형을 재분류했다. 투입요소기준 규제는 기술기준이나 설계기준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가장 널리 사용된다. 다른 규제방식에 비해 규제기관의 집행비용은 낮지만 피규제자의 순응 비용은 불필요하게 높다. 규제기준의 획일성 탓에 규제 회피 행위가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반면, ‘우수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GMP)’ 같은 성과기준 규제, 쓰레기 종량제 같은 경제유인 규제, 배출권 거래제 같은 시장기반 규제방식이 시장 친화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규제 실패의 이유로는 과도한 규제 목표와 집행자원의 제약, 규제의 획일성과 경직성을 꼽았다.

저자는 미국 대법관 브랜다이스의 “정부의 의도와 목적이 선해 보일 때가 바로 우리가 가장 경계심을 갖고 자유를 수호해야 할 때”라는 인용문으로 책을 맺었다. 책을 관통하는 시장주의가 불편할 수도 있겠다. 특히 “시장경쟁을 통해 나타난 결과의 공평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대단히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하이에크의 주장엔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을 알아야 규제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원칙에는 동의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시장에 개입할 때는 나무를 잘 알고 다듬는 법에 정통한 정원사처럼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정부도 그래야 한다.

가격은 신성하다…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은 존중돼야

최병선 교수는 『규제 vs 시장』에서 자유주의 사상가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1899~1992)와 법경제학의 선구자 로널드 코우즈(1910~2013)를 비중 있게 소개한다. 둘 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정부와 규제의 속성을 꿰뚫고 있는 이들의 눈으로 시장을 다시 봐야 한다는 취지다.

하이에크는 시장 덕분에 인간은 ‘널리 분산된 지식의 활용’을 할 수 있었고 위대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고 본다. 시장은 설계자가 따로 없는 자생적 질서다. “수많은 사람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다. 시장의 모든 것은 가격에 축약된다. 고도의 정보가 담긴 가격은 신호(signal)이자 유인(incentive)이다. 가격은 원가도 아니고, 노력에 대한 보상(rewards)도 아니다. 최 교수는 “가격은 복잡한 세상에서 오로지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이 꽤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 상황을 단순화해 주는 수단”이라고 썼다. 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절해선 안 되고,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은 존중돼야 한다. 그래서 ‘가격은 신성하다’고 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시장 경쟁은 ‘발견 절차’다. 경쟁해야 누가 최선인지 가려낼 수 있다. 경쟁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고 새 지식이 된다.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완전경쟁시장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완전경쟁이 아니어도 시장은 작동한다. 사람이 합리적이어야 경쟁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경쟁이 시장 참여자를 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코우즈는 거래비용 패러다임의 창시자이자 재산권 이론으로 유명하다. 한 번도 정식 경제학 교육을 받지 않았고 덕분에 주류경제학과 전혀 다른 새 영역을 개척했다. 논문 ‘기업의 본질’에서 거래비용 때문에 기업 안에서는 가격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논파했다. 기업 조직을 만들면 고용계약 등 생산에 필요한 계약의 숫자를 대폭 줄일 수 있고 거래비용도 그만큼 준다. 유명한 ‘코우즈 정리(定理)’를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시장 실패라고 정부 개입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시장 행위자들의 자율에 맡기면 재산권 거래와 협상을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코우즈는 시장의 자율조정 기능을 강조하는 신제도경제학의 태두다. 시장은 중장기적으로 시장의 불완전성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후생경제학의 원조인 아서 피구에 대해선 시장의 불완전성을 핑계 삼아 정부의 간섭과 규제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