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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애싱턴 그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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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부 기자

유성운 문화부 기자

20세기 초 영국 더럼 지역 광부들이 미술계를 강타했던 적이 있다. 애싱턴 그룹이라고 불린 이들은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뒤, 광부들의 일상을 투박한 터치로 묘사해 큰 반향을 이끌었다. 이들의 작품은 더럼 북쪽 탄광 시설을 개조해 만든 우드혼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광부화가들’이 이들의 이야기다.

한국도 그랬듯 영국도 광부들은 산업 발달의 역군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이들을 빼고 논할 수 없다. 하지만 채산성이 떨어지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1980년대 탄광 파업과 정부의 강경 진압은 이곳에 큰 생채기를 남겼다. 뮤지컬과 영화로 잘 알려진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이 바로 이 시기의 더럼이다. 남부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북부의 상황은 여전하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더럼에 도착한 것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여전한 지난달 28일 아침이었다. 영국에서 손꼽히는 더럼 대성당의 내부는 다른 유명 성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곳에는 광부들을 위로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영국 성당에서 참전 군인을 기리는 비석은 많이 봤지만 노동자를 위한 것은 처음이었다. ‘가장 깊고 어두운 갱도에서 자신의 삶을 바친 이들, 그리고 지금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광부들을 기억해 달라’는 글귀를 보며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최근 한국에선 종교가 정치 갈등의 전면에 서곤 한다. 이미 정치 양극화가 심한 사회다. 사제가 아니더라도 ‘전선(戰線)’에 투사로 서겠다는 이들이 넘쳐난다.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종교의 역할이 더욱 절실한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