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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60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중앙일보

입력

마법의 힘 갖게 된다면 어떻게 쓸 건가요

소피는 잉거리란 나라에 사는 평범한 소녀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준 모자 가게를 운영하며, 가족을 보살피죠. 하루는 제과점에서 일하는 동생을 만나러 가던 중 짓궂은 군인들에 둘러싸여 곤경에 처하는데요. 그때, 마법의 힘을 가진 청년에게 도움받죠. 마법으로 군인들을 조종해 떠나게 한 청년은, 적에게 쫓긴다며 소피와 함께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그리고 춤추듯 하늘을 걸어 소피를 목적지에 데려다주곤 사라져요.

그는 바로 하울. 미인의 심장을 가져간다는 위험한 소문이 도는 마법사죠. 소문과 달리 하울은 소피를 해치지 않았어요. 소피는 자기가 미인이 아니라 그랬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죠. 하울을 쫓던 황야의 마녀가 소피에게 저주를 걸어 한순간에 꼬부랑 할머니로 변했거든요. 이대론 집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한 소피는 마녀의 말대로 저주를 풀기 위해 하울을 찾아 떠납니다. 한참을 여행한 소피는 안개 속에서 신비한 집을 발견해요. 놀랍게도 그 집은 불의 기운으로 증기를 뿜으며 걸어 다니는 거대한 성, 하울의 집이었죠. 과연 소피는 하울을 만나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을까요.

마법의 힘으로 증기를 내뿜으며 걸어 다니는 하울의 성. 증기나 마법 같은 기술은 우리 삶을 더 편하게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우리 삶을 파괴하는 무기로도 이용될 수 있다.

마법의 힘으로 증기를 내뿜으며 걸어 다니는 하울의 성. 증기나 마법 같은 기술은 우리 삶을 더 편하게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우리 삶을 파괴하는 무기로도 이용될 수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웃의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으로 잘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입니다. 영국의 작가 다이애나 윈 존스가 1986년에 선보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에요. 원작의 독특한 마법 설정을 매력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평소의 미야자키 감독 작품과 다르다는 평도 있지만, 증기를 뿜으며 천천히 움직이는 고철 로봇 느낌의 거대한 성이나 마법 기술을 전쟁에 이용하려는 제국 같은 설정은 ‘천공의 성 라퓨타’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기존 작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애니메이션은 이야기 진행 과정이나 인물 설정 등 원작과 다른 점이 많은데요.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성이 나온다는 겁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제목처럼, 캘시퍼라는 악마의 마법으로 움직이는 성은 작품의 또 다른 주역이죠. 아이들과 대화를 위해 여기저기 학교를 방문하던 중, 한 아이에게서 ‘움직이는 성의 이야기를 써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시작한 작품인 만큼, 성을 빼곤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거죠. 마법 그 자체가 아니라 마법의 힘으로 작동하는 장치라는 설정은 이 작품의 매력을 더해줍니다. 바로 ‘스팀펑크’라는 독특한 분위기로 말이죠.

스팀펑크(SteamPunk)는 컴퓨터나 로봇 같은 전자 기술이 발달한 미래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쳐내는 사이버펑크(CyberPunk)에서 비롯한 이야기 갈래입니다. 보통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같은 분위기에서 증기 기술로 작동하는 기계나 장치들을 활용한 이야기가 펼쳐지죠. 증기자동차와 증기선, 증기로 움직이는 공장 등 일상부터 전쟁까지 이들 기술 덕분에 돌아가죠. 하울의 성이나 각종 병기는 마법으로 움직이는 게 더 많지만, 이 역시 마법이란 ‘기술’로 움직인다는 느낌입니다. 이를 매직펑크나 아케인펑크라고 불러요.

증기나 마법 같은 기술은 우리 삶을 더 편하게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우리 삶을 파괴하는 무기로도 이용될 수 있죠. 증기 기술이 발달하면서 범선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증기선이 바다를 질주하고 거대한 전차가 대지를 짓밟는 것처럼요. 이는 마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욕물을 데워주고 요리도 하는 마법의 불은, 동시에 사람을 해치고 마을을 파괴하죠. 흔히 판타지에서 기술은 사악한 개념으로 등장하곤 하지만, 기술은 선도 악도 아닙니다. 제국이 마법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 제국을 마법으로 막을 수도 있죠.

빅토리아 시대는 산업혁명으로 제국주의가 극에 달한 시기입니다. 사람들의 삶은 전반적으로 편해지는 듯했지만,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이에 따라 범죄도 늘어났죠. ‘잭 더 리퍼’ 같은 끔찍한 범죄자가 날뛰던 그 시대에 사람들은 ‘셜록 홈스’ 같은 영웅을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 역시 지혜만이 아니라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이죠. 이야기에서 그는 ‘피를 검출하는 약물’을 만든 걸 기뻐하며 등장하거든요. 흥미로운 점은 셜록 홈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최악의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기술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법 역시 마찬가지죠. 원작에서 소피는 자신이 말한 게 뜻대로 되는 마법의 힘을 지녔는데, 그 탓에 스스로를 노인이라고 생각하고 늙은 모습으로 변합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소피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때 젊어지는 연출은 이런 점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어요. 소피의 마법은 자신을 노인으로 변하고 힘들게 했지만, 동시에 악당을 물리치고 캘시퍼에게 자유를 줍니다. 같은 기술이라도 인간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작동할 수 있는 것.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원작과 애니는 서로 다르지만, ‘기술의 선악은 마음에 따라 다르다’라는 스팀펑크의 기본 정신은 공유합니다. 그런 면에서 새해,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떠올릴 때 좋은 작품이 아닐까요.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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