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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4.6% 올릴 때 영국 89% 인상…전기료 현실화, 野도 인정 [신년기획 - 에너지 과소비 스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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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서울 시내의 전기계량기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서울 시내의 전기계량기 모습. 연합뉴스

"제발 불을 꺼주세요.(Bitte Licht aus)"

독일 슈투트가르트 도심의 마리팀 호텔 객실마다 부착된 스티커 문구다. 이 호텔의 얀 스팔렉 매니저는 "에너지 소비량이 많아지는 계절에는 실내 온도를 제한하고, 객실을 비울 때 반드시 전등을 꺼달라고 당부한다"고 말했다. 스티커를 부착한 뒤 숙박객들이 알아서 전등을 끄는 경우가 늘었다.

슈투트가르트 외곽에 사는 대기업 직원 필립 윈클러는 최근 들어 가스 난방 장치를 경유 열교환기로 바꿨다. 그는 "치솟는 에너지 비용 때문에 그나마 덜 오를 것으로 보이는 경유를 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호텔 방에 붙어있는 ″불을 꺼달라″는 내용의 스티커. 슈투트가르트=이동현 기자

독일 슈투트가르트 호텔 방에 붙어있는 ″불을 꺼달라″는 내용의 스티커. 슈투트가르트=이동현 기자

러시아산 천연가스·원유 등에 의존하던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에너지 대란 우려가 크다. 이에 어떻게든 에너지 효율을 올리려는 정책이 이어진다. 공공 부문은 당연하고, 민간도 예외가 없다.

냉난방 온도 제한과 조기 소등은 기본이다. 독일은 수영장·사우나 등에서 온수 사용을 금지했고, 통행량이 적은 시간대에 신호등을 껐다. 핀란드는 사우나를 1주일에 한 번만 하자는 캠페인, 네덜란드는 샤워 시간을 5분 이하로 줄이자는 캠페인을 벌일 정도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5월 에너지 위기 대응책인 'REPowerEU 계획'을 발표했는데, 소비자 에너지 절약을 통한 소비량 5% 절감 목표가 담겼다.

이들 정책의 핵심은 요금을 올리는 동시에 소비는 강제로라도 억제하는 것이다. 에너지 위기를 맞이한 세계 주요국의 전기요금은 1~2년 새 크게 뛰어올랐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2021년 1월~2022년 6월 한국의 전기요금 인상률은 4.6%(주택용·산업용 등 종합 평균)에 그쳤다. 반면 이탈리아는 106.9% 급등했고, 일본(35.6%), 프랑스(25.6%), 미국(21.5%) 등도 두 자릿수 인상 폭을 피하지 못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러한 방향성은 하루 이틀 만에 정해진 건 아니다. 중장기적으로 선진국은 한국보다 훨씬 많이 요금을 올리고 있다. 한전에 따르면 최근 30년간(1990~2020) 미국의 주택용 전기요금 인상률(PPP(구매력평가환율) 기준)은 68%로 한국(22%)의 3배를 넘었다. 독일(187%)은 한국보다 8배 이상 올랐다. 전기 사용을 덜 하라는 '가격 시그널'이 오랫동안 작용해왔다는 의미다.

자발적인 수요 감축에만 기대지도 않는다. 공공장소와 생활공간 전반에 의무 규제를 적용하면서 필요할 경우 강제 수단도 꺼내 든다. 스페인은 냉난방 시설이 있는 건물의 자동문 닫힘 장치 설치를 의무화했다. 프랑스는 상점이 문을 열고 냉방할 경우 750유로(약 101만원)의 벌금을 매겼다.

프랑스 파리에 사는 교민 박모씨는 에너지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연말연시 분위기가 좀처럼 나지 않는다고 했다. 늘 밝게 개선문을 비췄던 조명이 사라지고, 깜깜한 상점들 사이로 가로등마저 꺼져 있어서다. 그는 "에너지 요금도 올랐을뿐더러 TV에선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공익광고가 종종 나온다. 몇달 만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고 말했다.

프랑스 노장쉬르센에 위치한 냉각탑 등 원전 시설 전경. 노장쉬르센=정종훈 기자

프랑스 노장쉬르센에 위치한 냉각탑 등 원전 시설 전경. 노장쉬르센=정종훈 기자

에너지 위기는 전력 공급원까지 빠르게 바꾸고 있다. 석유·가스 가격이 비싸다 보니 발전 비용이 싸고 전력 공급도 안정적인 원전으로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에너지 안보를 내세워 원전 확대에 뛰어든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2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050년까지 최대 14기의 신규 원전을 짓겠다는 '원전 르네상스' 계획을 내놨다. 전력 발전량의 약 70%를 원전이 차지하고 있지만, 이를 더 끌어올린다는 복안이다.

로렌스 피케티 프랑스 원자력청(CEA) 차장은 11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는 원전이 있는 데다 에너지 절약 노력도 이어지면서 전력 공급에 별문제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엔 에너지 주권 확보 차원에서도 원전 필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에너지 효율화 노력은 비슷한 처지인 한국에도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 에너지 자립률이 낮고, 원유·LNG(액화천연가스) 등을 전량 수입해야 한다. 하지만 수요 억제나 요금 인상이 늦으면서 한전이나 가스공사 등 공기업들에 비용 부담을 떠넘기는 상황이다.

이는 정부와 정치권이 지지율 같은 정치적 이유로 요금 인상을 억눌러온 여파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임기 5년간 탈원전 정책을 강행하면서 비싸고 수급이 불안정한 액화천연가스(LNG)와 신재생에너지를 늘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2017년 5월 "탈원전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매년 전기요금을 2.6% 인상해야 한다"고 보고했지만, 문 정부는 오히려 요금 인상을 외면했다. 지난해 한전 영업손실 규모는 34조원, 가스공사의 미수금은 9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신년기획 - 에너지 과소비 스톱

시민단체나 야당에서도 한전 재무를 개선하려면 요금 인상이 답이라고 강조한다. 에너지전환포럼은 최근 "올해 1분기에 전기·가스요금 인상 요인을 100% 반영하는 정상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양이원영 의원도 지난달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전 적자 해결책은 명료하다. 전기 요금에 연료비 등 발전원가를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공공기관의 어려움을 감안하면 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고물가 상황 등을 감안해 2026년까지 단계적으로 요금을 인상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전기요금 인상 폭은 지난해 총 인상액(㎾h당 19.3원)보다 커지지만, 요금 현실화를 통한 에너지 사용 감축까진 갈 길이 멀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창의융합대학장은 "주요 선진국처럼 정치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 전문가 조직에 요금 결정 권한을 맡기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지난달 보고서에서 "에너지 위기 장기화로 국내 에너지 비용이 상승하면 유럽의 위기 대응책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거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기요금 현실화, 에너지 소비 절감 캠페인 등 여러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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