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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직 방'만 따뜻해요…얼어죽을 공무원 '난방 카스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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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발 시려운 게 10년 만에 처음이래요. 직원들이 서로 떨다가 눈 마주치면 ‘춥죠’ 하고 인사해요.”

영하 기온의 한파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28일 서울 광나루한강공원 일대 한강이 새벽 중부지방에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다. 연합뉴스

영하 기온의 한파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28일 서울 광나루한강공원 일대 한강이 새벽 중부지방에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다. 연합뉴스

세종시에 사는 교육부 공무원 A씨는 이 말을 하면서도 수시로 핫팩에 손을 비볐다. 공무원 다수는 실내에서도 한파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명 ‘에너지 다이어트’로 불리는 정부의 공공기관 실내 난방 17도 제한 정책 탓에 사무실에 냉기가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공무원들 사이에선 “추워서 일이 안 된다”는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자 지난 10월 “관공서가 위기 극복에 앞장서겠다”며 행정부 산하 1019개 공공기관에 에너지 절감 5대 실천강령을 적용했다. 강령에는 ▶난방 17도 이하 유지 ▶개인 난방기 금지 ▶난방기 순차운휴 등이 포함됐다. 공공기관 난방 제한 온도를  17도까지 내린 건 올해가 처음이다.

공공기관 에너지 절감 5대 실천강령 홍보 포스터 [사진 한국에너지공단]

공공기관 에너지 절감 5대 실천강령 홍보 포스터 [사진 한국에너지공단]

17도 넘으면 바로 히터 끈다…“추워서 타이핑도 못쳐”

경상북도 소재 공기업에 근무하는 조모(32)씨는 “핫팩을 끼고 사는데도 손이 시려워 타이핑을 못 친다”며 “회사에 감기 환자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고 토로했다. 이어 “17도 넘어가면 바로 히터가 꺼진다. 공공기관 사람은 얼어죽어도 된다는 거냐”고 분노했다.

서울 종로구의 정부서울청사 공무원 B(26)씨는 “에너지 감축이라는 명분은 백번 공감하지만 업무에 방해가 될 정도의 추위는 너무한 처사라는 생각이 든다”고 호소했다. 이달 초 국민건강보험공단 블라인드에는 “회사에서 화장실 비데가 제일 따뜻하다”는 불평 섞인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달 초 국민건강보험공단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 건보공단 직원들이 “본부에서 화장실 비데가 제일 따뜻하다” “이거 보고 비데 점검도 하겠다”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보자 제공]

이달 초 국민건강보험공단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 건보공단 직원들이 “본부에서 화장실 비데가 제일 따뜻하다” “이거 보고 비데 점검도 하겠다”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보자 제공]

금지된 개인 난방기에 의존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A씨는 “나이드신 분들은 전기 방석을 몰래몰래 꺼내 쓰는데 걸리면 얄짤 없이 못 쓴다”고 말했다. 천안시 공무원 서모씨는 “전기 핫팩, 발 난로, 건식 족욕기 등 안 쓰던 전열기구까지 다 꺼내쓰고 있다”고 푸념했다.

이를 두고 민주노총 공무원노조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개인 난방기 없인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라며 “에너지 절약은커녕 낭비를 유발하는 탁상행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주무부처인 산자부 관계자는 “난방 제한을 풀어줄 계획은 없다”며 “일단 따뜻하게 껴입으시라”고 조언했다.

신(新) ‘난방 카스트’의 등장

일선 현장에선 직급별·부서별로 난방 차이가 난다는 불만도 다수 접수됐다. 일종의 ‘난방 카스트(caste·계급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B씨는 “고위공무원급 사무실에 인사차 가보면 따뜻하고 쾌적하다”며 “우린 민방위복까지 꺼내 입어도 덜덜 떤다”고 하소연했다. 환경부 산하 지청에서 일하는 30대 공무원 C씨도 “직원들은 핫팩으로 손을 녹여가며 일하는데 청장님실은 따뜻하더라”고 말했다.

상황은 시·구청도 비슷했다. 가령 지난 27일 기자가 찾은 서울시청 1층은 17.3도를 유지했지만, 오세훈 시장을 비롯한 고위직이 모여있는 6층은 집무실 바깥에서부터 18.9도를 기록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1층은 현관문이 양쪽에 있어 온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며 “신청사엔 단열재를 잘 써서  다른층은 18~22도다. 주말엔 별다른 난방을 안해도 18도 이하로 잘 안 떨어진다”고 반박했다.

지난 27일 오전 기자가 찾은 서울시청 6층 입구는 창가 인근에서도 18.9도를 기록했다. 6층은 시장실과 부시장실(행정1·2부시장), 시장 특별 보좌관인 정무특보·정책특보·민생특보 등 고위공무원들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서울시청 1층은 17.3도를 유지했다. 김정민 기자

지난 27일 오전 기자가 찾은 서울시청 6층 입구는 창가 인근에서도 18.9도를 기록했다. 6층은 시장실과 부시장실(행정1·2부시장), 시장 특별 보좌관인 정무특보·정책특보·민생특보 등 고위공무원들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서울시청 1층은 17.3도를 유지했다. 김정민 기자

부서에 따라 더욱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기도 한다. 서초구청 관계자는 “기후환경과는 서울시가 에너지 소비 현황을 불시 점검하겠다는 공문을 보낸 뒤로 아예 난방을 끄고 산다고 한다”고 말했다.

국회·법원 못 건드리나…“협조 공문은 보내”

‘난방 카스트’는 행정부 밖에서 더 공고해졌다. 입법부와 사법부가 정책 대상에서 빠지면서다. 형평성 논란이 불거진 대목이다. 2017년 20대 국회가 헌법기관을 에너지이용 효율화 조치 의무 대상에 명시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지만, 당시 국회 상임위원회 법안소위는 ‘삼권분립 위배’란 명목으로 입법을 무산시켰다.

국회·법원 등은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절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회 설비과 관계자는 “17도를 최대한 맞추려고는 하는데 본회의장, 의원회관, 큰 강의실 등 행사가 많은 곳은 적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산자부 관계자는 “이들 기관엔 협조 공문을 보내 참여를 독려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국회와 법원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각각 2만989CO2t, 7만1052CO2t으로 공공기관 평균의 4배와 15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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