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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약자 편에 서야 진정한 중재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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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호 35면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양극화, 양극단, 극한대립 같은 날 선 언어들이 마음을 할퀴는 요즘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왜 이토록 ‘공정한 중재자’가 부족한 것일까요. 누구의 이해관계에도 휘둘리지 않고, 강자와 약자, 그사이에 올곧게 존재할 수는 없을까요. 확고하게 그저 나, 우리, 아군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의 입장에서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이에 존재하는 길’이겠지요. 모두가 양극단으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세상에서 매개자가 되고 균형추가 되어 주는 존재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진정한 중재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약자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강자의 목소리는 중재를 필요로 하지 않거든요. 그들의 목소리는 지겨울 정도로 직접적으로, 자주, 시끄럽게 들립니다. 신문에서도,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오직 강자들의 언어만이 크고 화려하게 울려 퍼지니까요. 진정한 강함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내 것을 포기할 수도 있는 용기’에서 나옵니다.

모두가 양극단으로 대립하는 세상
강자의 목소리는 중재 필요 없어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 고난 가득
그렇지만 그들 눈은 형형하게 빛나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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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언제나 위태로운 양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녕을 포기하고, 약자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제대로 들릴 때까지, 온몸으로 마이크가 되고 확성기가 되어,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삶과 죽음 사이, 사랑과 증오 사이, 일상과 성스러움 사이, 힘 있는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만의 사적인 ‘행복’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아닐까요.

그리하여 가장 견디기 어려운 ‘사이’의 고통은 바로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사이의 노동’은 바로 ‘돌봄’입니다. 매들린 번팅은 『사랑의 노동』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돌봄은 늘 고통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돌봄에는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꿋꿋하게 직면하고 버티면서 슬픔을 함께 나누고 변함없이 곁에 있어 주고 신체 및 신체의 배설물로 엉망진창인 물리적 현실을 기꺼이 다루고자 하는 마음이 수반된다.”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에서 주인공 강창래(한석규 분)는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 다정(김서형 분)을 위해 매일 필사적으로 요리를 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아내’와 ‘아직 엄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아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 사이에서 부지런히 아내의 마지막 순간들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들어 주고 싶어 합니다. 부담스럽게 로맨틱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고, 냉정하게 현실만을 직시하지도 않는 길, 담담하게 그저 아내 곁에 있어 주는 조용한 견딤의 길이 바로 ‘요리’입니다. 아내가 ‘아들과 제주도에서 먹던 돔베국수가 그립다’고 하니, 남편은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돔베국수를 만들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는 ‘아내가 기억하는 돔베국수의 맛’과 ‘온갖 책들과 인터넷 정보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합하여 공부해 낸 돔베국수의 맛’ 사이에서 고심하여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바로 그 그리운 돔베국수를 만들어 냅니다. 경험과 상상 사이에서,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요리를 정확하고도 절묘하게 기어코 해내는 것이야말로 ‘사이의 존재’가 만들어 내는 사랑의 기적입니다. 아내의 투병 전, 두 사람은 이혼 위기에 있었지요. 하지만 암과 싸우느라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 그는 어떻게든 몸에는 좋고 맛도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고심합니다. 음식에 대한 그리움, 음식과 얽힌 건강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과 싸우는 아내의 말 못 할 고통을 남편은 온몸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삶과 죽음 사이의 그 고통스러운 여정을 아내와 함께함으로써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습니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렇듯 고통받는 존재를 향한 처절한 공감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진정으로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의 눈은 형형하게 빛납니다. 저는 언제나 그런 ‘사이’의 존재들에 매혹됩니다. 저는 우리 옛 신화의 바리데기처럼 산 자와 죽은 자의 가운데, 그 사이에서 존재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오디세우스처럼 인간과 신 사이에서 그 다리를 놓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빨강머리 앤처럼 집이 없는 존재와 집이 있는 존재들 사이의 영원한 간극을 메워 주는 따스한 메신저가 되고 싶습니다. 이 간절한 꿈이 너무 거창하다면, 지금은 우선 ‘희망을 포기하려는 사람들’과 ‘그래도 희망을 선택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고 싶습니다. ‘유튜브로 모든 공부를 대신하려는 사람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을 선택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고 싶습니다. ‘먹고살기 팍팍하여 사랑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사람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하고 누군가와 함께 살기를 선택하며 새로운 생명을 택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고 싶습니다. 이 차가운 양극단의 시대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서로’를 더 깊이, 더 필사적으로 존중하고 공감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모든 버려진 마음들은 여전히 간절하게, 언젠가는 당신에게 이해받고 사랑받을 순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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