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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순수함과 무개념 사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20호 34면

서정민 문화선임기자

서정민 문화선임기자

지난 11일 시작한 MBC 예능 프로그램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이하 태세계)의 스타트가 좋다. 1·2회 연속 시청률이 동시간대 경쟁 프로그램이자 12년째 장수 예능 프로그램인 SBS ‘런닝맨’을 앞섰다. 웹툰 작가이자 방송인 기안84, 배우 이시언,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의 무계획·무근본·무걱정 남미여행기를 보여주는 ‘태세계’는 여러모로 MBC 간판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이하 나혼산)’의 스핀오프 작품을 연상시킨다. ‘나혼산’ 멤버였던 김지우 PD가 메인 연출을 맡았고, 기안84·이시언·쌈디·송민호 등 ‘나혼산’ 출신 연예인들이 주요 출연진이다. 마치 ‘나혼산’ 여행 특집편 같다.

검증된 인물들로 안전하게 시작한 이 프로그램이 무엇보다 제대로 성공한 전략은 기안84의 ‘엉뚱한’ 캐릭터를 무한대로 확대시켜, 유감없이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안84는 호불호가 꽤 갈리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그의 엉뚱함을 ‘순수함’ ‘천진난만함’이라며 좋아하고, 누군가는 ‘무개념’ ‘비매너’라고 싫어한다.

기안84 캐릭터 이용한 여행 예능 화제
‘인증샷 찍기’ 지친 시청자 선택이기도

아무튼 ‘이상하게 자유로운’ 기안84의 황당한 행동은 여행 초반부터 많은 화제를 모았다. 열흘 넘는 일정이지만 여행 가방엔 옷 한 벌(티셔츠1, 반바지1), 팬티 3장, 양말 1켤레, 노트, 여권, 마스크, 무선 이어폰이 전부다. 잘 곳도 먹을 것도 즐길 거리도 현장 박치기. 제작진이 의도한 대로 기안84는 웬만한 여행객이라면 철저히 준비했을 모든 것을 무시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함을 또 대충 잘 넘어간다.

바로 이런 대목들에서 기안84에 대한 시청자의 호불호가 또 부딪친다. 젓가락이 없으면 손으로 밥을 먹고, 숙소를 못 구하면 길거리 노숙도 좋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그의 날 것인 용기에 환호하는 이들이 있다. 반면 모든 사람이 이용하는 공공 공간에 팬티 빨래를 늘어놓고, 아무 때나 “○○○하고 자빠졌다” “××” 욕을 쏟아내는 대책 없는 무신경에 눈살 찌푸리는 이들도 있다. 어느 쪽이 우세하든 프로그램 자체는 화제성 면에서 성공한 셈이다. 무플보다 악플이라고, 좋든 싫든 수많은 시청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태세계’의 화제성이 기안84라는 출연진의 캐릭터 때문만일까. 팬데믹의 터널을 빠져나온 올해, 국내외 여행객이 급증하면서 ‘여행’ 패러다임에 큰 변화가 생겼다. 12월 초 호텔예약 사이트인 부킹닷컴이 전 세계 32개 국가 및 지역에서 2만4000명의 여행객을 대상으로 ‘2023년 주목해야 할 여행 트렌드’ 설문조사를 한 결과 7가지가 꼽혔다. 오프그리드 여행(무소유 여행), 여행지에서의 완전히 다른 문화 경험, 가족과 함께하는 추억 감성 여행, 웰니스 여행, 여행을 위한 전략적 소비, 회사 차원의 여행에 관심, 메타버스를 통한 새로운 여행 방식에 관심 등이다. 이 중 적어도 4개는 ‘신선하고 새로운 체험’과 연관 있다.

지금까지 여행 스타일은 철저히 ‘인스타그램’에 의해 좌우됐다. 핫플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유명 장소에 가고, 핫템 사고. 이 모든 스케줄의 기본은 ‘필샷(반드시 인증샷 찍기)’. 메뚜기 뛰듯 인증샷 찍기에 열중하느라 그 집 빵맛이 어땠는지 기억은 없는 경우도 많다.

여행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 인기 연예인의 여행치고는 소박하게 진행된 JTBC ‘트래블러’도 이제훈·류준열 등의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강조하느라 최선을 다한 모습이 역력했다. 연예인 등산가 윤은혜·유이·효정·손호준이 킬리만자로(해발 5895m) 정상에 도전하는 tvN 예능 프로그램 ‘인생에 한 번쯤 킬리만자로!’ 역시 훈련이라는 이름 하에 호숫가 물놀이, 탄자니아 초원 사파리 투어 일정을 보여줬다. 산에 오르는 것과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여행에 싫증난 이들에게 기안84의 ‘무대뽀’ 여행은 자연스럽고 순수한 여행방식으로 느껴질 것이다. ‘기안84 스타일’이든, ‘태세계식 여행’이든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경험 소비’ 여행을 찾기 시작했다. 새해에는 ‘내 스타일의 여행’에 도전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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