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소나무 껍질 먹은 이성자, 섬유 기질 판화로 표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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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호 27면

‘예술가의 한끼’

해방후 한국 미술인 최초로 파리 유학과 작가생활을 한 이성자. 사람도 작품도 프랑스 예술가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 이성자기념사업회]

해방후 한국 미술인 최초로 파리 유학과 작가생활을 한 이성자. 사람도 작품도 프랑스 예술가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 이성자기념사업회]

1950년대의 파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멀고 먼 곳이었다. 파리의 미술학교 그랑드쇼미에르 아카데미, 도무지 한국인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그곳에 분명 한국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이성자(1918~2009)였다. 아이 셋을 고국에 두고 온 만학도였다.

이성자는 전남 광양의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본향은 진주다. 이성자가 태어날 무렵 그의 부친은 하동군수를 지냈다. 그리고 김해군수를 거쳐 창녕군수가 되었다. 부친의 임지를 따라 이성자는 어린 시절을 김해, 창녕에서 보냈다.

이성자는 창녕에서 4년을 살았다. 창녕 읍내에서 화왕산은 지척이다. 보통학교에서 군청관사로 돌아오려면 개천을 건너야 했다. 화왕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개천이 되어 흘렀다. 찬물에 들어가 큰 돌을 들쳐 가재를 잡았다. 봄에는 창녕사람들이 삐삐라고 부르는 어린 띠를 뽑아 먹었다. 조심스레 껍질을 벗기면 은백색의 털이 달린 부드러운 순이 비집고 나왔다. 생명의 시작인 양 결이 고왔다. 오물오물 씹으면 단맛이 났다. 맥추(麥秋) 직전의 늦봄이나 초여름에는 아직 푸릇한 밀이삭을 태워 먹었다. 목가적인 생활이었다.

생활고에 헌 침대 시트 캔버스로 써

1974년 11월 19일부터 11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린 이성자 개인전. 왼쪽부터 도진규, 김종학, 박서보, 이성자, 박명자. [사진 이성자기념사업회]

1974년 11월 19일부터 11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린 이성자 개인전. 왼쪽부터 도진규, 김종학, 박서보, 이성자, 박명자. [사진 이성자기념사업회]

정년을 맞이한 부친을 따라 진주로 왔다. 진주는 냉면도 비빔밥도 조금만 담아다 주는 세련된 미식의 고도(古都)였다. 촉석루에서 가까운 진주제일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현 진주여고)에 들어갔다. 학교 도서관의 문이 닫힐 때까지 빅토르 위고, 모파상,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렘브란트, 세잔, 반 고흐의 미술 서적에 몰입했다. 그림을 잘 그렸다. 그러나 자신이 나중에 세계적인 화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학교를 마치자 일본 동경의 짓센(実践)여자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전공인 가정학과에서는 수리, 기계, 양재, 건축, 영양학, 의학, 섬유, 심리학, 요리 등을 가르쳤다. 대부분이 당대의 여성들에게는 낯선 과목들이었다. 이성자는 특히 건축에 관심을 가졌다.

1938년에 결혼하여 인천에서 살림을 차렸다. 남편은 의사로 훗날 ‘먹는 재미 사는 재미’라는 음식 에세이집을 낸 외과 의사 신태범이었다. 창녕과 진주에서 먹던 겨울철의 대구가 인천에 와선 여름철의 민어로 바뀌었다. 인천에는 백합, 동죽, 가무락, 맛살, 바지락 등 조개가 풍부했다. 북성동 중국인촌에는 다채로운 청요리가 있었다. 1948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 삼선교로 이사했다. 결혼생활은 중간에서 끊어졌다. 전쟁 중이던 1951년, 모든 것을 다 털고 홀로 파리로 갔다. 불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처음에는 의상디자인학교에 들어갔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디자인학교 선생의 권유로 순수미술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1953년 그랑드쇼미에르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우리 나이로 36세 때의 일이다.

여류화가로는 나혜석(1896~1948)이 1927년에 파리에 와서 8개월간 체류했고, 백남순(1904~1994)이 1928년에 파리에 와서 2년간 유학생활을 한 기록이 있다. 그게 전부다. 1953년 당시 파리에서 미술을 하는 한국인이라곤 이성자가 유일했다. 1955년이 되어서야 박영선(1910~1994), 남관(1911~1990), 김흥수(1919~2014) 등이, 이듬해에는 권옥연(1923~2001), 이응로(1904~1989), 함대정(1920~1959), 김환기(1913~1974) 등이 파리에 와서 터를 잡았다. 그들은 다 일본에서 미술대학을 마친 후 한국의 대학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견 화가들이었다. 파리 경력으로만 치면 이성자가 가장 선배격이었다. 이성자는 그들과는 달리 미술을 처음부터 파리에서 공부하게 된 특이한 경우였다.

그랑드쇼미에르에서 만난 교수가 앙리 고에츠다. 고에츠의 제자가 된 지 1년 만에 그의 조교가 되었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조교를 하다가 1958년에 졸업을 하였다. 생활은 힘들고 정신은 빛나던 시절이었다. 이성자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새 캔버스는 비싸서 헌 캔버스를 썼다. 헌 침대의 시트를 잘라 아교 칠을 해서 캔버스로 대용했다. “내가 붓 하나를 더하면 우리 애들이 밥을 한 숟갈 더 먹고 잘 큰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은 붓질을 하면 아이들이 안 아프다고 생각했다. 붓질은 아이들의 교육이었다.” 그녀의 술회다.

1957년부터 헤이터 판화공방 17아틀리에서 판화를 배웠다. 헤이터 기법은 한판의 동판으로 다색을 표현하는 단판다색판법이다. 이성자는 동판이 선뜻 당겨지지 않았다. 어느 날 그랑드쇼미에르 아카데미의 화우 로돌프뷔시가 목판화로 전시 포스터를 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성자도 목판화를 찍기로 했다. 이성자는 목판화를 두고서 ‘섬유 기질의 의지’(제1회 이태리깔삐 국제 현대목판화를 위하여, 이성자, 1969년)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창녕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성자는 소나무의 흰 속껍질을 씹어 껌으로 만들었다. 소나무와 삐삐의 껍질 속에 숨겨진 단단하거나 혹은 부드러운 섬유의 기질, 누구보다도 풀과 나무에 친숙했던 그 섬유의 기질을 판화로 표현했다. 그러기 위해 시나 베니어처럼 목판화용으로 가공된 판목이 아닌 직접 원목을 잘라 판목으로 만들어 썼다. 목판화 칼에 큰 저항이 왔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58년 파리에서의 첫 개인전이 라라뱅시 화랑에서 열렸다. 전시 포스터로 목판화 작품을 사용했다. ‘르 몽드’를 위시하여 프랑스의 여러 신문과 잡지들이 이성자의 전시를 다루었다. 전시 역시 대성공이었다.

회화 1300점, 판화 1만2000점 남겨

‘내가 아는 한 어머니’ 캔버스에 유채, 130x195㎝, 1962년. [사진 이성자기념사업회]

‘내가 아는 한 어머니’ 캔버스에 유채, 130x195㎝, 1962년. [사진 이성자기념사업회]

판화 작업은 그의 회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판화는 여러 색판을 중층적으로 쌓아 올려 작품이 완성된다. 칼의 운용은 붓의 운필보다 어렵다. 자칫 도필(刀筆 잘못 쓴 글씨)이 되기 쉽다. 더구나 이성자의 판목은 단단한 재질이어서 칼이 쉽게 나아가지 않는다. 선을 짧게 가져가야 한다. 1960년이 되자 마치 칼보다 더 강한 끌로 목판 위를 촘촘하게 찍어낸 듯, 캔버스 위에서 유채를 머금은 짧은 선이 중첩되는 그녀의 매력적인 운필이 작업의 특징을 이루었다. 1962년, 어머니 박봉덕의 환갑을 기려 제작한 ‘내가 아는 한 어머니’에서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난다. 미술을 공부한 지 채 10년이 되기 전에 대가급의 반열에 올라버린 이성자의 원숙한 필세에 고국에 가지 못해 더 안타깝고 절절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이 작품에 오롯이 녹아있다.

이성자는 성격이 밝고 적극적이었다. 이방인으로 그랑드쇼미에르 아카데미에 다닐 때 교수들에게도 나이 어린 화우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평론가이자 훗날 프랑스 문화성 미술담당관이 되는 질다스 파르델(1906~1997)은 이성자의 작품에 매료되어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목판화 작업을 권면하여 이성자를 샤르팡티에 화랑에 소개했다.

샤르팡티에 화랑의 대표 레이몽 나셍타는 1964년 이성자의 목판화전을 연다. 카탈로그 제작에 인색한 파리다. 그는 이성자의 전시 카탈로그를 제작해주었다. 그리고 비행기 티켓을 사주며 서울에 가서 한국의 미술계에 카탈로그도 보여주고, 아이들을 만나보고 오라 했다. 1965년, 이성자는 도불 15년 만에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았다. 세 아들도 만났다. 감개무량했다. 서울대학교 의대의 함춘홀에서 회화 37점, 판화 40점으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한국의 미술계와 전혀 무연한 작가가, 그것도 파리에서 큰 성공을 거둔 작가가 갑자기 서울에 나타났다. 문화계의 충격이었다. 이후 서울의 현대 화랑과 전 세계의 화랑과 미술관에서 수많은 전시를 열었고 찬사를 받았다.

이성자는 한국의 풍토에서 나오기 어려운 거인이었다. 그녀의 자존감은 고결한 품위를 지키게 했다. 자신감은 끝없이 새로움에 도전하게 했다. 이성자는 1968년 남프랑스의 투레트에 아틀리에를 구했다. 2009년 거기서 종신을 맞았다. 회화 1300여점, 판화 1만2000여점, 도자기 500여점을 남겼다. 최선을 다해 삶을 소진했다. 그리고 광양, 김해, 창녕, 진주, 인천, 서울, 파리를 다 버리고 그녀의 후기작업의 주제이자 참된 본향인 우주로 돌아갔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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