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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고친 법안, 與 뒤늦게 좌절했다…법사위장 내준 野빅픽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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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거야(巨野)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독주를 막아온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뚫리기 시작했다. 법사위는 법률안이 본회의로 넘어가기 전에 체계·자구 심사를 하는 곳(국회법 86조 1항)이다. 쉽게 말해 각 상임위원회를 통과해도 법사위를 넘지 못하면 본회의로 갈 수 없는 모든 법안의 최종 관문인 셈이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여야 간사인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과 김승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양곡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에 대한 본회의 부의 요구의 건 상정에 앞서 언쟁을 벌이고 있다. 뉴스1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여야 간사인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과 김승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양곡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에 대한 본회의 부의 요구의 건 상정에 앞서 언쟁을 벌이고 있다. 뉴스1

현재 법사위를 이끄는 김도읍 위원장은 국민의힘 소속이다. 그래서 민주당이 각 상임위에서 법안을 처리하더라도 국민의힘 입장에서 법사위가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면서 거야 민주당도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당이 지난 28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회법 86조 3항을 이용해 양곡관리법 직회부를 결정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해당 조항은 ‘법사위가 법률안이 회부된 날부터 60일 이내에 심사를 마치지 않을 경우, 소관 상임위원장은 상임위 재적 위원 5분의 3 이상 찬성으로 본회의 부의를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쉽게 말해 법사위가 안건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소관 상임위가 곧바로 본회의로 보낼 수 있는 직통 창구인 셈이다.

지난 10월 19일 민주당이 농해수위에서 단독 처리한 양곡관리법은 법사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70일간 계류됐다. 그러자 민주당이 이를 돌파하려 직회부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농해수위는 부의 요청권을 지닌 민주당 소속 소병훈 위원장을 비롯해 19명 위원 중 11명이 민주당 의원, 1명이 민주당 출신 윤미향 무소속 의원이라 법안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국회법 86조. 사진 국가법령정보센터 홈페이지 캡처

국회법 86조. 사진 국가법령정보센터 홈페이지 캡처

직회부 조항은 2012년 국회선진화법 도입 때 그동안 법사위가 해오던 상왕(上王) 노릇을 제한하려 도입됐다. 그런 이 조항이 이번에는 특정 정당의 일방 독주에 활용된 것이다. 이 조항은 2017년 변호사가 세무사 자격을 자동으로 취득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의 세무사법 개정안을 법사위가 막았을 때 활용된 적 있지만 당시는 기획재정위 소속 여야 의원의 합의로 진행됐다.

유례없는 민주당의 작전에 정치권에선 “민주당의 노림수가 현실화했다”는 말도 나온다. 사실상 사문화했던 이 법안을 지난해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국민의힘에 내주는 과정에서 손질한 게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민주당은 직회부 조건을 법사위 계류 ‘120일 이내’에서 ‘60일 이내’로 반 토막 냈다. 당시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개정이지만, 국민의힘 관계자는 “법사위의 기능을 하루라도 빨리 무력화시키려 고친 것 같다”고 했다. 국민의힘 입장에선 뒤늦게 당시 민주당의 의도를 알아차린 셈이다.

지난해 7월 23일 박병석 국회의장(가운데)과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원내대표(오른쪽), 국민의힘 김기현 원내대표 등 양당 원내대표단이 상임위원장 배분에 합의후 합의문을 읽고 있다. 임현동 기자

지난해 7월 23일 박병석 국회의장(가운데)과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원내대표(오른쪽), 국민의힘 김기현 원내대표 등 양당 원내대표단이 상임위원장 배분에 합의후 합의문을 읽고 있다. 임현동 기자

단독 직회부라는 새로운 전략을 내놓은 민주당은 앞으로도 이를 계속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8·28 전당대회에서 취임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각종 입법 드라이브를 하면서 줄곧 “가진 권한을 모두 사용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대표 측은 “직회부는 우리가 가진 권한 중 하나”라고 말했다. 농해수위처럼 위원장이 민주당 소속이며 재적 위원 5분의 3 이상이 친민주당 성향으로 구성된 상임위는 전체 17곳 중 9곳이다. 정무위·교육위·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문화체육관광위·농해수위·보건복지위·환경노동위·국토교통위·여성가족위다.

이미 민주당에선 직회부 카드로 국민의힘을 압박하는 발언도 나왔다. 지난 28일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국토위 민주당 간사인 최인호 의원은 “법사위에 계류 중인 안전운임제 연장 법안이 두 달 후 국토위로 넘어오면 모든 의원의 힘을 합쳐 본회의에 상정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말 일몰하는 안전운임제 유효 기간을 3년 더 연장하는 이 법안은 지난 9일 민주당과 정의당이 힘을 합해 국토위에서 처리했지만 법사위에선 막혀 있는 상황이다.

안전운임제 연장 법안과 함께 민주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방송법 개정안이나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도 직회부 지름길이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KBS 등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편을 담은 방송법 개정안은 지난 2일 과방위 전체회의에서 민주당이 단독 의결했다. 노란봉투법은 여야 견해차가 남아있긴 하지만, 민주당이 마음만 먹으면 상임위 통과가 가능하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국민의힘에선 당혹감이 흐른다. 법사위 소속 의원은 “우리가 문지기로 버틸 수 있었던 60일이 차츰 여러 법안에서 깨져가고 있다”며 “이제 민주당을 막을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국회선진화법은 여야 합의 정신이 핵심인데, 민주당이 안건조정위 무력화에 이어 또 꼼수를 쓴다”며 “민주당이 거야의 힘으로 의회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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