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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눈빛 친구’를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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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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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렇게 생기셨구나….”

후배 여기자와의 1년 전 점심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난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절, 4인 식사가 허용돼 마련한 자리였다. 재기발랄한 15년 후배는 사실상 처음 대면하는 부장이 마스크를 벗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외모 평가’를 하고 말았다. 민망했는지 “얼굴을 처음 뵙는 거라…잘, 생기, 셨네요”라고 수습을 했다. 카톡과 전화로 수개월 동안 지지고 볶았던 선후배였건만, 대면의 순간엔 ‘코로나 디스턴스’를 절감했다. 이후 퇴사해 행복하게 사는 후배의 추억 속엔 마스크 쓴 아재의 눈빛만 남아있지 않을까.

눈빛으로만 사람과 접하고
당연한 것 못 누린 아이들
코로나 이후 각별히 챙겨야

칸막이가 설치된 책상에서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듣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모습. [뉴스1]

칸막이가 설치된 책상에서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듣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모습. [뉴스1]

돌이켜보면 지난 3년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식당에 가려면 체온을 재야 했고 QR코드로 백신 접종 인증을 했다. 마스크 사려고 약국 앞에 줄을 선 기억은 이제 까마득하다. ‘마기꾼(마스크+사기꾼)’으로 몰렸다는 분노, 마스크 벗는 게 팬티 벗는 것처럼 부끄럽다는 하소연은 처절했다.

요지경 세상에 ‘해방’의 여명은 밝아온다. 방역 당국은 일정 조건(주간 확진자 2주 연속 감소, 위중증·사망자 감소, 4주 내 중환자 병상 가용능력 50% 이상, 고령자 등의 접종률 상승 중 2가지 충족)이 되면 실내 마스크 의무를 해제하겠다고 했다. 새해 1월이면 ‘그날’이 올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더 빨리 해제하자는 여론, 의무가 아니어도 계속 마스크를 쓰겠다는 신중론이 교차한다.

마스크에서 벗어나면 영화 속 시간여행자처럼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게 될까. 포스트 코로나가 코로나 이전과 비슷할 것이라는 기대는 접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런 기대는 살아온 세월이 넉넉한 아재들의 근시안일 공산이 크다.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라. 어른들에게 당연했던 추억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지. 코로나 3년에 휩쓸려 뒤틀린 삶의 패턴은 차고 넘친다. 올해 재수종합반 생활을 한 내 딸과의 일화도 그중 하나다.

“친구는 좀 사귀었니? 아빠도 재수할 땐 동병상련하는 학원 친구들이 힘이 되더라.” “학원에서 대화하면 벌점이야. 눈빛으로만 알고 지내는 거야. ‘눈빛 친구’랄까?”

모든 재수생이 그러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코시국의 재수학원은 어느 때보다 싸늘했던 것 같다. 마스크는 안전을 명분으로 학업을 옥죄는 수단이 됐다. 매일 만나면서도 한 번도 이름을 불러본 적 없는 애매한 관계, 눈빛 친구가 그렇게 탄생했다. 재수 우정을 30년 넘게 나누는 아빠에겐 생소한 풍경이다.

그보다 어린 ‘코로나 베이비’들에겐 눈빛 친구조차도 부러운 일상일지 모른다. 팬데믹이 영유아의 발달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 때문이다. 이화여대 아동발달센터가 올해 7월부터 3개월 동안 서울 마포구·서대문구 육아종합지원센터와 협력해 만 2살(2019년도 출생) 아이 545명의 발달선별검사를 해봤더니 18.34%(100명)가 발달 지연이 의심됐다고 한다. 코로나19 이전의 유사한 검진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 조사를 진행한 이화여대 아동발달센터 김선경 부소장은 “검사 형식이 다르기 때문에 코로나19 이전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면서도 “발달 지연 의심 18%는 일반적으로 나오기 어려운 높은 수치”라고 걱정했다. “영유아는 또래 혹은 성인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언어발달이 이뤄진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어린이집을 안 갈 땐 또래 간 교류가 줄었고, 키즈카페·놀이터 등에서 마음껏 뛰놀며 다양한 경험을 해볼 기회도 제한됐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눈만 보이고 표정을 알 수 없는 생활을 했다. 검사자들도 정서적으로 낯을 가리는 아이가 예년보다 눈에 띄게 늘었다고 입을 모은다”고 김 부소장은 설명했다.

김 부소장은 “마스크 때문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고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코로나 베이비가 처한 현실은 걱정스럽다고 했다. 감정적 공감 방식을 미처 배우지 못한 채 눈빛만 보는 삶을 살고 있어서다. “눈만 보고는 사람의 희로애락을 알 수 없잖아요”라고 김 부소장은 안타까워했다. 대책을 묻자 “더 세심하게 보면서 발달을 도울 수 있는 교육과 보육을 고민하는 것 말고는 당장 마땅한 방법이 없다. 해외에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엔데믹에 접어들 새해에 우리는 마스크를 쓰느냐 벗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과 맞닥뜨릴 것이다. 앞선 세대의 당연한 경험을 하지 못한 후세대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도 풀어야 할 과제다. 세월호를 겪고도 이태원을 놓쳐 피눈물을 흘리는 한심한 어른들이기에, 연말연시의 각오는 어느 때보다 각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