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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파업'이 탄생시킨 차이나타운...세계 모든 대륙에 있다 [채인택의 세계 속 중국]

중앙일보

입력

필리핀 마닐라의 비논도 차이나타운. [사진 셔터스톡]

필리핀 마닐라의 비논도 차이나타운. [사진 셔터스톡]

전 세계 모든 대륙엔 차이나타운이 있다. 중국을 떠난 중국인인 화교들이 타민족 속에 둘러싸여 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언어, 문화를 지키는 차이나타운은 전 세계 최소 19개 나라에 35개 이상이 존재한다. 세계 속 중국을 살피는 데 있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주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진출 지역과 함께 차이나타운은 양대 기둥을 이룬다. 격주로 이들 두 곳의 모습을 조망하고자 한다.

차이나타운은 21세기 중국의 위상을 살피는 핵심 요소다. 차이나타운은 전 세계 40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교들의 거주지일 뿐 아니라 문화·경제·교육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교들의 상당수는 현지에서 유권자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힘도 함께 키워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의 의회나 내각에서 화교 정치인을 보기는 어렵지 않다. 태국에선 화교 출신의 아피싯 웨차치와가 총리를 맡기도 했다.

아시아에만 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라오스‧캄보디아‧브루나이 등 16개, 미주에도 샌프란시스코‧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워싱턴‧호놀룰루‧보스턴‧시애틀∙필라델피아 등 8개 이상의 차이나타운이 번성하고 있다. 유럽에는 영국 런던 한복판인 웨스트엔드와 버밍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벨기에 안트워프, 프랑스 파리 등에 차이나타운이 자리 잡고 있다.

고립된 소수민족 군락, 또는 이종문화권으로 시작했지만, 글로벌화와 중국의 경제적 진출 등에 따라 차이나타운은 각 지역에서 주목받는 지역이 되고 있다. 문화 교류나 중국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지리적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화교들은 타문화권에 둘러싸인 차이나타운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인적‧문화적 결속을 유지해왔다. 춘절(영어권에선 아예 Chinese New Year로 통한다)이 되면 거리 곳곳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사자놀이를 하며 축하한다. 차이나타운에는 으레 도교 사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북송(960~1127) 때부터 전통신앙의 대상이 돼온 마조(媽祖)상이나 마조묘가 있다.

마조묘는 화교 사회를 중심으로 전 세계 26개국에 1500개가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유네스코는 2009년 10월 마조 신앙과 풍습을 무형문화재로 등재했다. 차이나타운의 화교들은 마조상을 집에 안치하거나, 마조상에 헌화하거나, 밤에 연등을 들고 돌거나, 마조 조각상을 물에 띄우는 등의 신앙 활동을 통해 가족의 평안과 특히 안전한 항해를 빈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어 표준어로 이야기했다가 말이 통하지 않은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는 지리적·역사적 요인으로 비교적 표준어를 사용하는 산둥(山東)계가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광둥(廣東)‧푸젠(福建) 등 남부 출신들이 많아 베이징 표준어보다 광둥어‧푸젠어‧민난(閩南)어‧차오저우(潮州)어‧하카(客家)어‧원저우(溫州)어‧닝포(寧波)어 등 다양한 사투리를 쓴다. 최근엔 표준어 보급이 활발한 것은 물론 글로벌화로 영어 사용자도 늘고 있다. 화교의 다양한 모습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가 계획적이고 체계적이며 국가 주도적인 구상이라면,차이나타운은 역사적·전통적 요소가 축적된 측면이 있다.

원래 중국인이 없는 지역에 중국인이 대량으로 이주하면서 형성된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세계 최초의 차이나타운은 필리핀 마닐라의 비논도다. 1594년에 들어선 것으로 인정받는다. 아시아 바깥에 들어선 차이나타운으로는 일반적으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호주 멜버른의 차이나타운이 오래된 곳으로 꼽히지만, 사실 미 서부 캘리포니아주와 호주 동부 빅토리아주에서 골드러시가 있었던 19세기 중반이었다.

필리핀에 차이나타운이 들어선 때를 따져보니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1572~1620 재위) 시절이다. 당시 명나라는 건국한 지 200년쯤 됐을 때로 국력이 서서히 쇠퇴하면서 왕조가 몰락하고 있었다. 만력제는 암군 중의 암군이었다. 초기 10년은 정사를 엄한 스승인 재상 장거정(張居正‧1525~1582)에게 맡겼다가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 30년 이상 조회에도 나오지 않고 2명의 황후와 18명의 후궁, 그리고 아이들, 애완동물과 놀면서 세월을 보냈다. 역사에 유일한 황제 파업인 셈이다.

대부분의 관리가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30년이 흘렀지만, 명나라가 계속 굴러갔으니 시스템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경제력이 받쳤다고 해야 할까. 결국 만력제가 세상을 떠나고 24년이 지난 1644년 베이징을 점령한 이자성(李自成)의 난과 숭정제(崇禎政‧1611~1644 재위)의 자살로 명은 멸망했다.

다만 만력제는 재위 기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해 1592~1598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터지자 병부상서 석성의 건의를 받아들여 파병하고 쓰촨과 오로도스의 반란을 진압하기는 했다. 북로남왜 시대에 황제가 파업을 했어도 척계광(戚繼光‧1528~1588) 등의 명장이 있어 용케 버틴 셈이다.

왜란에 파병한 공로로 조선에선 1704년 숙종 30년에 오늘날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워 신종을 제사 지냈다. 만동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온 말로 '황하(黃河)가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의미다. 이를 두고 '사필귀정(事必歸正)'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다' '황제를 향한 충성심' 등 다양한 해석이 제기된다.

만력제 시대 나라가 이러니 명나라를 떠나서 동남아에 자리 잡는 중국인들이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늘어나는 왜구에 대한 대응으로 명나라는 1567년과 1570년 해금을 완화해 세금을 내고 허가장을 내면 바다로 나가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미 명나라 때 늘어나는 민간 무역 수요가 정부의 정책을 움직였던 것이다. 누르는 것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욕구의 분출이었다.

중국인이 해외에 나가서 거주하고 무역하는 것은 물론 외국인이 중국에서 무역하는 길도 열렸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명나라 세종 가정제(嘉禎·1521~1567 재위) 시절인 1553년 지방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마카오 체재를 인정받았다. 만력제가 즉위한 1572년부터는 중앙 조정의 승인도 받아 금·은과 도자기·아편 등을 무역할 수 있게 됐다. 무역과 함께 가톨릭 교육도 본격화해 김대건 신부(1821~1846)가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했다. 마카오는 1888년 포르투갈령이 됐다.

하지만 그 무렵 동남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의 주요 도시에 그보다 더 큰 화교들의 통상 및 정착지인 차이나타운이 줄이어 세워지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채인택 국제 저널리스트

더차이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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