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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이야기와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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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광운대 교수

진중권 광운대 교수

“이승만 때 친일 청산이 안 된 업보를 짊어져 지금까지 우린 77년을 고통 속에 살았다. 다시는 밀정이나 변절자들이 지금처럼 죄책감 없이 살아가면 결코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장관이 강남의 어느 술집에서 새벽까지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제보자 B씨가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글의 취지는 자신의 여자친구인 첼리스트 A씨가 지금 권력의 압력을 받아 진실을 감추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보가 허위로 드러났으면 사과를 해야 하나, 이를 거부하고 제 행위를 정당화하려다 보니 음모론적 상상력까지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음모론의 바탕에 깔린 프레임이다.

이 젊은이는 여전히 ‘친일청산’을 얘기한다. 해방된 해에 태어났어도 지금 77세. “밀정이나 변절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리 만무하건만, 그의 머릿속 대한민국에선 그자들이 여전히 아무 “죄책감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진보 진영 일각에서 제 지지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즉 ‘민족주의 서사’다.

역사의 질곡이 된 민족주의 서사
극단적인 자유 지상주의 목소리
모두 ‘공동체의 적’ 배제에 악용
좌든 우든 청산주의 정치 경계를

이게 그저 B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역사 왜곡 처벌법, 친일파 파묘법 등 그동안 민주당에서 추진해온 일들을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이미 오래전에 현실적 타당성을 잃은 순수한 허구에 불과한 이 이야기가 여전히 한국의 진보를 지탱하는 주요한 서사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게 이상한 일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 이데올로기의 바탕에는 이야기들이 깔렸다. 그 이야기들은 본질적으로 허구다. 움베르토 에코는 마르크스주의를 “트리에르 지방(마르크스의 고향)에서 발생한 묵시록의 일파”라 비꼬았고, 폴 크루그먼은 “시장의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때로는 그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다. 나치즘의 바탕에는 우월한 독일의 아리안 인종이 열등한 다른 민족들을 복속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깔렸다. 지금 푸틴을 지지하는 러시아인들은 러시아가 미국과 서방의 퇴폐문화에 맞서 인류의 영혼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이야기를 굳게 믿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공동체 성원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묶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그 공동체에서 배제해야 할 성원들의 적대상을 구성해 그들을 솎아내는 역할도 한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유산계급, 자본주의자들에게는 공산주의자, 나치에게는 유대인, 푸틴에겐 서방의 첩자 우크라이나가 바로 그런 대상들이다.

청년 B씨가 속한 상상의 공동체에서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친일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이 속한 상상의 공동체에서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주사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믿고 있을 게다. 그래서인가? 얼마 전 대통령은 “북한을 따르는 주사파와는 협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허구에 사로잡히면 존재하지 않는 헛것을 보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청년 B씨의 눈에는 여전히 “밀정이나 변절자들”이 보이지 않던가. 이념적 허구에 사로잡히면 대통령직에 있는 이라도 별수 없다. “지금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규모 의견을 가진 세력들도 존재한다.”

내가 아는 한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하면 당연히 자유민주주의를 가리킨다. 그런데도 굳이 그 앞에 꼭 ‘자유’라는 말을 붙이는 이들은 과거엔 독재정권을 지지했고, 지금은 극단적인 자유 지상주의를 주장하는 이들뿐이다.

이야기에 사로잡힌 이의 눈에 상대는 공동체를 위태롭게 만드는 내부의 적일 뿐이다. 그들은 협치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히 청산의 대상. 그래서인가? 집권한 지 7개월이 넘도록 윤 대통령은 아직 야당 인사들을 만나지 않았다. 지난 문재인 정권도 청산주의 정치에 몰두하다가 결국 정권을 내주고 말지 않았던가.

‘노조부패’를 공직부패, 기업부패와 함께 3대 부패로 규정한 것도 내 귀에는 매우 과격하게 들린다. 어디에나 있는 부패가 노조라고 없겠는가마는, 노조부패가 정말 국가가 슬로건으로 내걸고 척결해야 할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인지는 모르겠다. 그 슬로건에선 노조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적개심만이 느껴진다.

허구의 이야기는 정책의 영역에서도 청산주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문재인 케어’를 포퓰리즘으로 낙인찍어 ‘철폐’하는 것은 당장 강성 지지층을 결집하는 정치적 효용은 있을지 몰라도, 고령화로 인한 의료비의 증가에 대비하고, 보장률을 OECD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정치적 신념이 이성과 논리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야기가 정치적 결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문제는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한다는 데에 있다. 이야기에서 복잡한 사회문제의 정교한 해법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야기로 구성된 현실 인식은 본질적으로 허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