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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발적 저성과자’라는 터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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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경희 경제부 기자

김경희 경제부 기자

“앞으로 단축근무와 관련해선 죄송하다는 말 안 했으면 좋겠어요.”

몇 달 전,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에 들어간 한 후배에게 건넨 말이다. 팀 내에서 근무를 조정할 일이 생길 때마다 괜히 미안해하는 후배의 모습이 2년 전 나와 겹쳤기 때문이다.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은 근로기준법에 따라 임신 초기인 12주 이전, 혹은 출산이 임박한 36주 이후로 하루 2시간씩 단축근무를 할 수 있는 제도다. 초기 유산이나 조산의 위험성을 낮춰 근로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로 2014년 도입됐고, 2016년부터는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고 있다. 또 임신 중이거나 출산 후 1년 이내일 때는 오후 10시 이후 야근을 할 수 없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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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생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이런 제도를 활용하는 게 이전보다 쉬워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좀처럼 극복하기 힘든 건 바로 이 ‘죄송함’이다. 내가 일을 적게 하는 만큼 팀원들이 더 고생하는 건 아닐까, 내가 야근을 못 하면 누군가는 더 자주 할 텐데…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어느새 죄송하다는 말을 또 입 밖에 내고 마는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들은 임신과 동시에 ‘반(半)자발적 저성과자’라는 터널에 진입한다(임신을 원했거나 최소한 후회하지 않았을 거라는 전제로 ‘반자발적’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일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칠 수밖에 없는데, 이걸 인정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사실 그런 자신에게 제일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터널에 진입한 후배들에게 죄송해하지 말라고 말하고 또 말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격려만 하는 게 아니라 가급적 팀원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화두를 던져, 함께 고민해보려고 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요즘 말로 바꾸면 마을에 가장 근접한 공동체는 직장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초혼인 신혼부부의 절반 이상이 맞벌이(2021년 기준 54.9%)고, 올해 상반기 여성의 경력단절 사유 톱3은 여전히 육아(42.8%), 결혼(26.3%), 임신과 출산(22.7%)이다.

‘신생아 연봉’이라고도 불리는 부모 급여를 확대하고, 육아휴직 기간을 1년 6개월로 늘린다지만 제도만큼 중요한 게 인식 변화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반자발적 저성과자’라는 터널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걸, 본인뿐 아니라 주변인도 인식하고 감내해줬으면 한다. 언젠가는 이 저출생의 터널 끝에서 함께 웃을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