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윤영호의 퍼스펙티브

임신·육아가 위기라는 청년층…육아공동체 확산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저출산 극복의 선결 과제

윤영호 서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윤영호 서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CNN은 지난달 한국이 엄청난 재정을 투입했지만 세계 최저 수준의 저출산 해결에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정부가 지난 16년 동안 260조원을 투입했지만 한국의 지난 3분기 출산율은 0.79로 세계 최저를 경신했다. 지난해 10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위원장 대통령)에 임명된 나경원 부위원장(장관급)은 “난임, 보육, 교육, 청년 일자리, 주택 마련 등에 과감한 거시적인 정책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필자도 동의한다.

새해부터 ‘부모 급여’ 제도 시행

급기야 정부는 ‘부모 급여’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새해부터 만 0세는 월 70만원, 만 1세는 월 35만원을 지급하고 2024년부터는 지급액을 각각 100만원과 50만원으로 확대한다. 이와 함께 공공보육과 시간제 돌봄 확대 방안 등을 담은 4차 중장기 보육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임신·육아 위기 상황에서 저출산은 단지 결과일 뿐이다.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결과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힘든 세상 물려주기 싫다” 30~40대의 최대 고민은 자녀 양육
임신·육아 등 총체적 위기, 세계 최저 출산율은 단지 결과일 뿐
육아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 안심하고 키우는 나라에 희망 있어
육아환경 좋은 기업일수록 생산성도 높아…정부·기업 공조 절실

육아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2018년 20~30대 청년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왜 내가 고생해서 번 돈을 애들에게 나누어줘야 하느냐” “나의 불행을 아이들에게 물려 주고 싶지 않다” “나 살기도 힘든데 애들을 키우면서 고생하기는 싫다” “힘든 세상에서 애들이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다” 등등.

자신이 행복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세상에 책임질 수 없는 후세의 불행을 낳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역대 최고로 집값이 폭등하면서 신혼부부들의 주택 보유 비중은 계속 하락하고, 젊은이들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결혼한 부부가 임신하면 “불행 시작, 행복 끝”이라며 축하보다는 자기 질책과 위로를 들어야 하는 시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필자가 진행한 2021년 전국 1000명을 대상으로 한 대표 집단 방문 조사 자료 중 인생 위기에 대해 분석한 결과, 30대에서는 2위, 40대에서는 1위로 가장 큰 위기가 바로 자녀 양육이었다.

돌봄 공백 등으로 육아 기피

개인 차원에서는 경제적 부담, 돌봄 공백, 여성의 이중 부담, 양육의 양극화, 육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 직장 스트레스가 육아 기피의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특히 요즘같이 생활 유지와 내 집 장만을 위해 맞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자녀 양육에 대해 더 많은 책임과 부담감을 지는 ‘독박 육아’로 인한 사회적 관계와 경력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심각하다. 승진 불이익이나 해고가 두려워 상당수 젊은이가 육아휴직 제도를 이용하길 꺼리는 게 현실이다.

20~40대 직장인의 70~80%는 육아가 애브러험 매슬로의 인간 욕구인 생리적 욕구, 안전, 애정·소속, 자아 존중, 자아 실현, 자아 초월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는 조사가 있었다. 청년들의 육아 기피 현상이 있지만, 여전히 인간 삶의 기본 욕구에는 육아가 중요하다. 부모로서의 기대는 있으나 현실이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생리적 욕구만이 아니라 주거 안정의 욕구와 공동체 일원으로서 존중받는 인정 욕구로써 주택 문제 해결과 일자리 보장 등 사회 안전망이 갖춰진 육아 공동체 문화가 정착되어야만 한다. 젊은 세대에게는 임신과 육아가 인생의 최대 위기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육아 공동체적 대응이라는 국가적 정책과 문화 패러다임을 먼저 전환해 성과를 낼 때 그 결과로서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안심하고 아이를 낳고 싶은 나라, 미래 희망이 있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

국민 67%, 가족친화기업 인증제 몰라

최근 기업들이 기업 문화를 가족 친화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여성가족부가 추진하는 가족친화기업 인증제가 도움될 것이다. 하지만 국민 3명 중 2명(67%), 아이들 돌보는 직장인 10명 중 6명(62%), 기업은 둘 중 하나(55%)가 이 제도를 모르고 있었다.

또 인증제가 중소기업에서는 차별성을 보이지만, 대기업에서는 인증 여부가 기업의 경영 철학과 정책, 운영 프로그램, 평가 등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대기업을 위해서는 보다 고도화된 인증 체계 등 개선이 필요하다. 임신·육아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위기라는 사실과 임신·육아에 대한 기업·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이루어져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픽 1〉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 1〉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필자의 연구팀이 아이를 돌보는 직장인 대상으로 한 임신·육아 정책 효과 조사에 따르면 임신·출산·의료비 경감(72%)이 가장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국공립, 직장 내 어린이집 확충(68%), 배우자 출산 휴가 및 육아휴직 확대(68%), 일과 가정생활 양립 가능한 근무 환경 조성(64%), 여성의 출산 이후 고용 안정 보장(64%), 예비 및 신혼부부 주거 지원(62%), 사교육을 포함한 양육비 부담 경감(60%) 순으로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현재 정부의 정책 지원 수준 평가들은 정책적 효과 기대와는 상당한 격차를 보였다.〈그래픽 1〉

기업 10개 중 7개, 육아 환경 취약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기업들의 지원은 어떨까. 기업들이 제공하는 지원 프로그램 중 탄력근무제(75%), 출산·양육·교육지원 제도(74%)가 가장 기대 효과가 컸다. 부양가족 지원 제도(69%), 육아 공동체 문화 조성 형성(63%), 근로자 지원 제도(60%), 세대별 패런터십 교육훈련 프로그램(54%) 순으로 긍정적 효과를 기대했다. 탄력근무제도의 수준(28%)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현재 기업 지원프로그램들의 수준이 효과 기대와는 역시 큰 차이를 보였다.〈그래픽 2〉

〈그래픽 3〉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 3〉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기업들의 임신·육아 지원 수준은 기업들의 임신육아친화지수를 이용한 진단에서 나타났다. 2021년 국내 대표 기업 150개가 자체 진단한 결과(노사 양측의 평균값 기준), 기업 10개 중 7개가 100점 만점 기준 50점 미만으로 임신·육아 환경이 취약했다. 조사에 참여한 100대 기업 18개 중 33%가 50점 미만이었다. 90점 이상의 우수한 기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기업은 단 하나도 없었다.〈그래픽 3〉

기업들은 “임신·육아는 개인적 문제인데 왜 직장까지 끌어들여서 업무에 방해가 되게 하느냐”며 임신·육아로 인한 직원 부족과 스트레스 증가, 이직률 증가, 생산성 감소 등을 강조했다. 어린이집과 같은 육아 시설을 갖추고 육아 휴직이나 탄력근무제도를 갖추는 것도 비용으로 보고 최소한으로 시행했다. 기업들의 임신·육아 친화 환경은 갈 길이 멀었다.

육아 친화 환경은 비용 아닌 투자

그러나 희망은 있다. 육아 환경이 잘 갖춰진 직장일수록 일하는 부모들의 임신·육아 위기 극복 역량이나 삶의 만족도가 높고, 자아실현 등 인간적 욕구의 성취도 좋다. 육아 문제를 해결해야 업무에도 집중할 수 있고 생산성이 올라가며 직장에 대한 애정도 높아져 결과적으로 회사에 도움이 된다. 직원들이 육아를 통해 인생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데 투자하는 회사를 위해 능력을 더 발휘할 것이다. 육아 친화적 경영이 기업과 직원들에게 상호 이익이 되고 경쟁 우위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저출산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는 기업의 육아정책과 환경 조성이 직원들의 자아실현과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라는 전략적 관점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지는 육아공동체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가치 사슬과 ESG(환경·사회·거버넌스) 성과 지표에도 통합되어야 한다. 일과 육아의 균형을 통한 자기실현의 기업 문화를 구축하기 위한 경영진의 결단과 역할이 중요하다.

육아 친화적 직장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만큼 정부는 기업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기 바란다. 육아 친화적 관행의 변화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인은 무엇보다도 정부 지원에 있다. 특히 저소득 근로자와 취약한 여건에 있는 직장인 부모들을 위해 정부·기업이 협력해 육아 친화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는 ‘육아 친화 환경조성에 관한 법’(가칭)을 제정해 이를 지원해야 한다. 학부모들과 국민 90%가 찬성한다. 육아 친화 환경 조성이 비용이 아닌, 사회적 가치와 기업적 가치의 공유 가치를 창출하는 투자라는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한 때다. 출산 순간부터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고 대한민국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키워 나갈 날을 기대한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