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비즈 칼럼] 난민들의 새해 소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4면

조명환 한국월드비전 회장

조명환 한국월드비전 회장

우크라이나에서 온 나탈리아와 아이들은 올해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할머니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냈다. 매년 온 가족이 모였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그럴 수 없었다. 남편을 홀로 우크라이나에 남겨두고 온 빅토리아 역시 세 살 아들과 함께 집이 아닌 몰도바의 난민센터에서 다가올 새해를 기다리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국내 실향민 여성들은 겨울이 되면 더욱 깊은 슬픔에 잠긴다. 지난해 아프간 국내 실향민 캠프에 살던 아동 중 열 명이나 추위와 영양실조로 숨진 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시리아 이들립 지역에 사는 난민 여성 역시 겨울은 항상 우울한 계절로 느껴진다. 경제활동은 더욱 어렵고 난방도 되지 않는 열악한 공간에 갇혀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다.

월드비전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란을 오거나 자국 내에서 고향을 떠나 사는 실향민 여성 가장들을 직접 만나 이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월드비전이 발간한 ‘혹독한 추위 속 난민 보고서’에 따르면 요즘같이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여성 실향민 가장들은 다른 취약계층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여성 가장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낙인, 경제활동과 자녀 양육에 대한 이중부담, 난방용품의 가격 상승, 추위와 열악한 주거환경, 의료시설 접근의 어려움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여성 가장들의 이러한 위태로운 상황은 때때로 미성년 자녀를 향한 신체적·정서적 폭력과 방임을 야기하며, 경제적 어려움은 자녀들을 아동 노동과 조혼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72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고아와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생겨났다. 월드비전이 이들을 돕기 위해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을 만큼, 홀로 자녀와 가정의 생계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여성 가장들은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다.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우리의 관심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에서 잊힌다고 이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재난과 분쟁으로 삶의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들은 이미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경험했기에 누구보다도 도움의 손길이 시급하다.

새해의 희망과 덕담을 주고받는 연말이지만 누군가에는 더없이 춥고 혹독하기만 한 겨울이다. 이들의 새해 소원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따듯한 이불과 난로일지도 모른다.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몸도 마음도 차갑게 식어버린 이들. 새해에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길 희망한다.

조명환 한국월드비전 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