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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학교 앞 교통사고, 막을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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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우승국 한국교통연구원 교통안전방재연구센터장

우승국 한국교통연구원 교통안전방재연구센터장

서울 강남구 청담동 언북초등학교 후문 앞 이면도로에서 지난 2일 교통사고로 어린 생명이 희생됐다. 초등학교 부근 이면도로는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도로가 붉은색으로 포장돼 있고 제한속도 20㎞/h 표시까지 있었지만 사고를 막지 못했다. 어린이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는 공간과 자동차 속도를 낮추는 별도의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고가 발생한 이면도로의 가파른 경사를 보면 이런 보호장치가 없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면도로는 안전한 곳이 아니다. 경찰청 교통사고 통계에 따르면 폭 9m 이하의 도로에서 사망사고의 약 60%가 발생했고, 언북초등 주변 같은 폭 6m 이하의 도로에서 사망사고의 약 40%가 발생했다. 이런 통계는 이면도로 교통안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어린 학생들이 주로 통행하는 학교 주변 이면도로라면 중요성이 더 크다.

서울 초등학생 이면도로서 숨져
보도·차도 구분, 일방통행 도입을
네덜란드 ‘보너프 정책’ 참고해야

언북초 초등생 사망사고

언북초 초등생 사망사고

어린이 보호구역 지정만으로, 도로 포장색을 달리하고 제한속도를 표시하는 것만으로 사고를 막을 수 없다. 자동차의 속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과속방지턱이 필요하다. 경사가 심해 과속이 우려되는 곳이라면 과속단속 카메라도 설치해야 한다.

자동차의 속도는 차로 폭에 비례해 높아진다. 따라서 이런 구간은 자동차가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차도를 최대한 좁게 만들어야 하고, 어린이가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는 공간인 보도는 최대한 넓게 확보해야 한다. 차량과 어린이 통행 공간을 분리하는 펜스도 설치해야 한다. 좁은 골목길에서 보도와 펜스 공간을 확보하려면 일방통행 운영이 필요하다.

3년 전 언북초등 측은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이면도로를 일방통행으로 바꾸고 확보된 공간에 어린이 안전을 위한 보도를 설치하자고 관할 지자체에 요구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강남구청은 주민 50명을 대상으로 일방통행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는데 다수 주민이 통행 불편을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정당한 의견수렴의 대상이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 교통 계획의 가장 첫 단계는 교통의 발생과 도착을 목적별로 예측하는 것이다. 즉 언북초등 주변 교통 계획은 어린이 등하교 통행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의견수렴은 학생과 주민 모두를 대상으로 해야 맞다.

언북초등에는 어린이 약 1900명이 매일 등하교한다. 어린이와 학부모를 고려하면 일방통행 요구는 수천 명의 목소리다. 이렇게 많은 목소리가 단 50명의 의견에 묻혀버린 것은 비상식적이다. 교통 시설의 설치에 대한 의견 수렴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는 자동차를 피할 곳이 없는 이면도로에서 많은 어린이의 통행 공간을 만드는 사업에 대해 소수 주민의 통행 불편은 반대 이유가 되기엔 부족하다.

1960년대 말 네덜란드에서 주거 지역 이면도로의 자동차 통행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주민들은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거지 입구 골목을 막았다. 도로에서 극심한 정체를 겪은 운전자들이 주거지 이면도로로 몰려들자 어린이들의 안전한 공간을 자동차에 빼앗긴 주민들이 분노한 결과였다.

이후 시 당국은 골목을 개방하되 이면도로의 자동차 속도를 보행자 속도로 규제했고, 속도를 낮추는 안전시설을 설치했다. 1976년 네덜란드는 이 제도를 전국 주거지에 확대 시행했고 ‘보너프(Woonerf)’라는 이름으로 법제화했다. 보너프 정책은 1990년대 모든 유럽 국가에 도입됐다. 이제 유럽의 모든 골목길에서 자동차는 보행자에게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

언북초등 주변 이면도로는 네덜란드에서 보너프 제도가 탄생한 계기가 된 골목길과 닮았다. 이면도로에서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네덜란드인은 골목길을 막았고, 의회에 진출해 보너프 제도를 법제화했다. 한국에선 통행 불편을 이유로 보도 설치에 반대했다. 이런 인식의 차이 때문인지 한국의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네덜란드의 두 배다.

흔히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라고 한다. 이런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학교 앞 이면도로를 안전하게 만드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어린이 보호구역 표시에만 그치지 말고 안전한 보행공간을 확보하고 자동차 속도를 낮추는 안전시설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우승국 한국교통연구원 교통안전방재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