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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반띵’ 예산 깜깜이 예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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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사이좋게 ‘반띵’을 했다. 여야가 치열하게 싸웠던 내년 쟁점 예산에서 많이 보였다. 정부안에서 빠졌던 ‘이재명표 예산’인 지역사랑상품권은 더불어민주당 요구액 7050억원의 절반인 3525억원이 배정됐다. 지역화폐는 지자체마다 사정이 다를 테니 지자체 돈으로 알아서 하라는 정부의 당초 입장이 무너졌다. 행정안전부 경찰국과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 운영경비 예산도 5억1000만원에서 2억5500만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학령인구 감소로 넘쳐나는 교육교부금의 초·중등 예산을 대학 지원에 쓰려던 정부 계획도 3조원에서 1조5000억원으로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국회 상임위와 예결위의 예산 심의가 얼마나 부실했으면 ‘반띵’이라는 해법밖에 내지 못했을까 싶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예산이 삭감되거나 정부 동의하에 증액될 경우에 어떤 근거와 계산하에 숫자가 달라졌는지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왜 지역화폐 예산이 하필 3525억원이어야 하고, 교육교부금 중 대학 지원을 위한 특별회계 전입금이 왜 1조5000억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저잣거리의 흥정도 아니고, 세계 10위권이라는 나라의 살림이 이래도 되는 건가.

지역화폐·교육교부금 전출금 등
왜 절반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어
속기록 작성해 추후라도 공개를

‘깜깜이’ 밀실 심사라는 막판 구태도 반복됐다. 아니, 올해는 더 심했다. 예결특위가 감액 심사도 못 끝내고 예산안을 이른바 ‘소(小)소위’로 넘겼다. 소소위에는 교섭단체 원내 지도부와 예결위 간사 등 소수만 참여한다. 국회법상 근거조항이 없어 속기록도 남지 않고 회의도 비공개다. 밀실에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숫자를 정하니 정실(情實)·부실 심의로 이어진다.

의원들이 소소위 단계에서 지역구 예산을 챙기는 관행도 여전했다. 민간 연구소인 나라살림연구소가 재미있는 분석을 했다. 국회에서 50억원 이상 증액된 국토교통부 사업이 32개인데 모두 임대주택과 상관없는 도로·철도·지역개발 사업이란다. 그런데 참으로 신묘한 점이 함양-울산고속도로, 광주-강진고속도로, 문경-김천철도, 문동-송정구지도 건설 등이 모두 50억원씩 증액됐다. 사업 성격과 규모가 각각 다른데 어찌 된 일일까. 사회적 요구가 아니라 정치적 고려로 증액됐기 때문이라는 게 연구소의 결론이다.

국회발 증액 사업은 ‘현수막 예산’으로 불린다. 이런 예산은 계획한 대로 투입되지 못하고 상당 부분 불용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현수막 홍보에 그치고 실제 지역 살림에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가계나 기업이라면 예산은 아낄수록 좋겠지만 재정은 다르다. 한정된 재원을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하는 게 예산이다. 의원님 민원 처리하느라 정작 필요한 곳에는 예산을 못 썼다는 뜻이다. 이런 의원님들, 지역표에 기대 국회의원 한 번 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국민이 인정하는 정치 지도자로 성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산 심의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소소위 과정을 공개하자는 지적이 있다. 일리가 있지만 시민단체·이익단체의 압력 때문에 오히려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분위기가 안 될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요구 예산의 0.8%만 반영됐다며 내년 초 지하철 시위 재개를 선언했다. 예산 투쟁을 하는 곳이 어디 전장연뿐이겠는가. 일단 속기록만은 남겨서 몇 년 뒤에라도 공개하자는 나라살림연구소의 제안에 동의한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예산 나눠먹기 관행은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산안 법정시한을 넘겨도 이젠 그러려니 한다. 헌법 위반임을 모두 아는데도 말이다. 예산이 늦게 나오면 재정 집행을 준비하는 시간이 부족하다. 이뿐이 아니다. 중앙정부 예산이 늦어지면 광역단체와 기초단체 예산이 줄줄이 늦어진다. 중앙정부에서 광역단체로, 광역단체에서 기초단체로 가는 보조금이 확정돼야 지자체가 예산을 짤 수 있어서다. 지방시대, 지방 살린다고 말만 앞세우지 말고 지각예산부터 반성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