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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추억 쌓기’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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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임종주
임종주 기자 중앙일보
임종주 정치에디터

임종주 정치에디터

엊그제도 그랬듯 크리스마스와 정치가 주는 이미지는 아무리 곱씹어봐도 상극이다. 가족과의 정겨운 추억 쌓기와 시끌벅적 요란한 정치 세상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불행히도 크리스마스는 곧잘 모진 정치의 세계와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이른바 빅 데이(big day)이곤 했다. 성탄절이라고 해서 정치가 가정으로 돌아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건 언감생심이다.
33년 전 크리스마스가 딱 그랬다. 집집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1989년 12월 25일 동유럽 루마니아에서 급전이 타전됐다.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와 부총리까지 지내며 막후 권력을 휘두르던 부인 엘레나가 총살형으로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반체제 인사 축출 항의로 시작된 티미쇼아라(루마니아 서북부 도시) 촛불시위가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그 후 불과 열흘 만에 25년 장기 집권 체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부부의 처형 직후 끔찍한 모습이 그대로 TV 전파를 탔다. 명절 분위기에 젖어 있던 전 세계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니콜라이 차우셰스쿠 전 루마니아 대통령의 생전 연설 모습. [중앙포토]

니콜라이 차우셰스쿠 전 루마니아 대통령의 생전 연설 모습. [중앙포토]

‘6만 학살자’로 낙인 찍힌 권력가의 비참한 말로는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됐다. 기억이론은 ‘차우셰스쿠 통치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따지기보다 ‘현재 시점에서 그 철권통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결코 되풀이돼서는 안 될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사회적 틀 안에서 끝없이 재생되면서 유지된다. 그렇게 형성된 집합기억은 거악의 재발을 억지한다. 티미쇼아라 출신 안드레이 우지커 감독의 다큐멘터리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의 자서전’(2010)은 그 같은 기억의 존속과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틀의 하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중앙포토]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중앙포토]

또 한 번 크리스마스가 들썩인 건 그 후 꼭 2년 만이었다. 그날 저녁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했다. 크렘린궁에 나부끼던 붉은색 소련 국기가 내려지고 러시아 연방 삼색기가 새로 게양됐다. 한 시대를 마감하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고별 연설에서 “우리는 냉전이 종식된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고 선언했다. 20세기 격변의 세계사 그 중심에 섰던 개혁·개방의 상징 고르바초프는 올해 8월 오랜 투병 끝에 9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추모 메시지가 답지했고, 많은 사람이 고르비(애칭)를 회상했다. 정치학자 안병진은 중앙시평(9월 20일자)에서 “냉전 종식의 산파로서,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개혁가로서 전 세계는 그를 추억했다”고 썼다.
기억과 추억은 의외로 좋고 나쁨의 잣대로 쉽게 구별된다. 통념적으로도 냉정하고 차가운 기억을 우리는 추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기억은 아련한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회상 여행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모든 추억은 기억으로 수렴되지만 모든 기억이 다 추억이 되지는 않는다. 크리스마스의 두 정치인은 그렇게 기억(차우셰스쿠)과 추억(고르바초프)의 대상으로 갈라진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전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보다리 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전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보다리 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기억과 추억이 공적 영역과 만나면 냉철한 분별력이 필요하게 된다. 4년 전 판문점으로 되돌아가 보자. 2018년 4월 27일 남과 북의 정상은 ‘도보다리 친교’라는 역사적 장면을 연출했다. 길이 50m, 푸른색 목교 위에서 펼쳐진 두 정상의 드라마틱한 산책과 담소 장면은 판문점 선언과 5·26 정상회담, 9월 평양 공동선언까지 숨 가쁘게 이어진 빅 이벤트의 신호탄이었다. 꿈만 같던 데탕트는 그러나 이듬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노딜 충격으로 종지부를 향해 치달았다.
당시 사정에 정통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최근 사석에서 일련의 사건을 기억외교와 추억외교의 차이로 설명했다. “미국은 철저히 기록과 기억을 토대로 대북 문제에 접근(기억외교)한 반면, 한국은 판문점 회담을 추억으로 여겨(추억외교) 회담을 또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앞섰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어느 쪽이 국익을 최우선 가치에 두고 냉정한 기억과 치밀한 셈법에 충실했느냐가 성패를 가름했다는 것이다. 추억하기의 패착으로 읽힌다.

불편한 기억만 남긴 2022 정치
국민에 즐거운 추억 선물 못해
지지층과 ‘그들만의 리그’ 몰두

옛 표현을 빌리자면, 무릇 정치의 정도는 사사로이 추억에 젖는 것을 경계하고 백성에게는 추억거리를 펼쳐주는 것이겠다. 지나간 시간을 반추해본다. 추억으로 삼을 만한 정치적 흔적이 어떤 게 있을까.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여든 야든 열성 지지층과 ‘그들만의 추억 쌓기’에 몰두한 탓이 크다. 그래서 남은 건 극단적 진영 갈등과 정치 양극화, 정쟁의 일상화다. 하나같이 불편한 기억들이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2013)에서 프루스트가 폴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속 대사처럼 ‘월드컵 16강 추억'의 홍수에 모조리 쓸려 보내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