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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윤석열 노동개혁 ‘도둑맞은 노동’ 될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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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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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노동개혁의 깃발을 올렸다. 화물연대 총파업에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해 스스로 철회하게 만든 뒤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다. 대통령은 “노노(勞勞) 간의 착취적인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것은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라며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직격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대기업 정규직의 40%를 겨우 넘는 수준의 임금을 받는 불합리한 임금구조를 뜯어고치겠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한 발 더 나아가 ‘노조부패 척결’을 선언했다. 국민의힘은 노조 회계를 공인회계사가 맡고 결산과 운영 상황 자료를 행정관청에 보고하도록 하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잇따른 조합비 횡령 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민주노총에 비상이 걸렸다. 공정과 정의라는 윤석열다움이 뜨겁게 부활하고 있다.

문재인 못한 것, 윤 승부수 던져
민심은 민주노총 부패 척결 지지
생각 다른 노동계와도 대화하고
중간·진보 마음까지 얻어야 성공

윤 대통령은 광주지검 검사로 근무할 때 기아차 노조 채용비리를 수사했다. 이후 “언젠가는 노동계의 부패를 일소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민주당의 오랜 우군이었고, 박근혜 정권을 몰아낸 ‘촛불’ 탄핵 집회의 주도세력이었다. 문재인 정권에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무소불위의 성역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윤석열은 민주노총에 빚진 것이 없기에 단숨에 칼을 뽑아든 것이다. 여론은 눈치를 보지 않는 윤 대통령의 편이다.

문제는 집권당의 부실한 뒷심이다. 윤석열이라는 걸출한 스타의 개인기로 운좋게 정권을 되찾았지만 탄핵당한 정당의 패배의식과 적당주의는 여전하다. 이명박 정부는 공무원연금 수령액을 삭감하는 개혁을 했다. 그러나 기존 공무원 연금은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미래 공무원의 연금만 후려쳤다. 비겁한 껍데기 개혁이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집권당 몫인 국회 공무원연금개혁특위 위원장을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했고, 주호영 정책위의장이 ‘강제 임명’됐다. 민주노총 산하 공무원노조의 위세에 벌벌 떨었던 보수정당의 흑역사(黑歷史)다. 윤 대통령이 이런 오합지졸을 거느리고 노동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윤 대통령에게는 민심이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다. 민주당도 민주노총을 끝까지 감싸기는 어려울 것이다. 승산이 있는 싸움인 셈이다. 다만 민심이 끝까지 내 편으로 남아 줘야 한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층은 민주노총을 혼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중간층과 진보 민심의 풍향은 조금 다르다. 민주노총의 악습에는 불만이 있지만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에 대한 냉담한 태도에는 반발할 것이다. 일탈한 노동운동을 바로잡는다면서 노동 그 자체를 죽이면 개혁은 저항에 부닥친다. 문제는 집권당이 노동친화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다르다. 강자에게는 강하지만 약자에게는 항상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다. 평생의 지인들은 “수도승 같고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쩌다 선물을 받더라도 모두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주곤 했다. 결혼 당시 전 재산이 2000만원이었던 이유일 것이다.

고(故) 노회찬 의원이 이 세상에 돌아온다면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윤 대통령의 노동개혁을 열렬히 지지할 것이다. 노회찬은 극단을 버리고 끝없이 중도의 길로 나아가면서도 항상 힘 없는 소수의 편에 섰다.  2012년 정의당 대표 수락 연설에서는 새벽 4시에 6411번 버스를 타고 강남의 빌딩으로 출근하는 여성 청소 노동자들을 소환했다. “한 달에 85만원을 받는 투명인간인 이분들이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라며 자책했다. 노회찬처럼 리얼리스트인 윤 대통령의 마음도 같을 것이다.

세상의 어떤 고통도 직접 겪고 있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 “내가 당신 처지를 더 잘 안다”면서 “내 말대로 하자”고 하면 큰 화를 부를 수 있다.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은 모든 걸 가진 청년이 ‘가난’이라는 빈자(貧者)의 남루한 영역까지 욕심낸 악행(惡行)을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다. 당사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일방적 개혁은 ‘도둑맞은  노동’의 지옥문을 열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이채필 전 노동부 장관이 친윤 의원 모임에서 제대로 쓴소리를 했다. 그는 “나는 정부 주도로 노동개혁을 일방 추진했다가 실패한 경험이나 사례를 잘 알고 있다”며 “진정으로 노동개혁을 하려면 노사 등 각계 인사의 다양한 의견을 초기 단계부터 수렴해야 한다”고 했다. 백번 맞는 말이다.

윤 대통령은 성탄절을 앞두고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이들을 위로했다. 보호 종료 후 홀로서기를 앞둔 자립 준비 청년과 보호아동들에게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났지만 인류를 위해 사랑을 전파했다”고 했다. 예수는 왜 익숙한 열두 제자가 아니라 하필이면 자신을 그토록 박해하던 로마시민 바울을 선택했을까. 왜 그를 통해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확장했을까. 이방인(異邦人)과 손을 잡아야 나의 좁은 세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노동개혁을 했는데 노동자가 더 외로워진다면 그건 개혁이 아닌 개악이다. 따뜻한 선의에서 출발한 노동개혁이 부디 ‘도둑 맞은 노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