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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왕이라도 만나지 않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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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성지원 기자 중앙일보 기자
성지원 정치부 기자

성지원 정치부 기자

성인이 된 직후 가장 강렬했던 연말의 기억은 자취방 수도관 동파였다. 서울이 그렇게 추운 곳일 줄 몰랐다. 낡은 빌라 원룸은 단열재가 약한 탓에 실내 온도를 조금만 높여도 가스비가 많이 들었다. 돈을 아껴보려고 외출할 때 보일러를 끄고 나간 게 화근이었다. 밤새 얼어붙은 베란다 수도관에 물을 끓여 부으면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다. 혹독한 연말이었다.

두 번째 자취방에선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저장식 온수기 용량이 너무 작아서 샤워를 조금만 오래 해도 금세 온수가 끊겼다. 추운 화장실에서 긴 머리를 재빨리 감기가 힘들어서 겨울에 머리를 짧게 잘랐다. 세 번째 방에선 벽지에 피어오르는 곰팡이와 사투를 벌였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22일 열린 전세보증금 피해 임차인 설명회에서 ‘빌라왕’ 관련 임차인 피해현황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22일 열린 전세보증금 피해 임차인 설명회에서 ‘빌라왕’ 관련 임차인 피해현황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수도관 동파, 에어컨 고장, 곰팡이, 변기 역류. 20대 내내 매년 새로운 ‘세입자 퀘스트’를 깨며 단련된 세입자로 폭풍 성장했다. 더 싼 가격에 더 큰 방. 알짜를 찾으려면 일부 예측불가능한 흠결의 값은 직접 지불해야 한다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지키면서. “내 집도 아닌데 서럽다”는 불만은 꾹꾹 삼키면서.

그러나 세입자 퀘스트로 ‘빌라왕’까진 예측 못 했다. 수도권 빌라·오피스텔 1139가구를 무자본 소유하다 사망한 빌라왕 사건의 핵심은 젊은 세입자였다. 부동산 계약을 잘 몰랐던 이들은 시세를 따지고 근저당을 확인해도 임대인이 임의로 바뀌고 전세금보험이 허위일 것까진 예측하지 못했다. 국토교통부가 전세피해지원센터를 통해 접수해 경찰에 수사 의뢰한 전세사기 의심거래 106건 중 68.8%가 부동산 거래 경험이 적은 2030이었다.

전셋값이 하락했다지만 고금리 한파마저 젊은 세입자에게 유독 혹독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금리인상 직격탄을 맞는 변동금리형 전세대출 잔액은 전체 전세대출 잔액의 93.5%에 달했는데, 대출자 10명 중 6명이 2030세대였다.

이 가운데 정부의 주거 지원대책이 유주택자에 집중되면서 2030 사이에선 “세입자는 어떡하느냐”는 불만이 나온다. 대책이 쏟아져도 일자리보다 잠자리가 불안한 현실이다. 한국갤럽이 9월 전국 성인남녀 1506명에게 ‘2030에 가장 필요한 경제정책’을 물은 결과 ‘일자리 정책’을 꼽은 40대 이상과 달리 20대와 30대는 ‘주거 지원 확대’가 가장 필요한 정책이라고 답했다.

지난 15일 열린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한 패널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주택가격이 하락해 빠른 월세화 등 임대차 시장에서 세입자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며 대책을 물었다. 대통령은 “민간·공공임대를 잘 믹스해서 공급하고, 다주택자 과세를 경감해 열악한 지위에 있는 임차인들이 저가 임차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답했다. 계약갱신 전에 정부가 약속한 감세의 낙수효과가 빠르게 나타나길 바랄 뿐이다. 아니면, 빌라왕이라도 만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