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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저금리’로 수출 키운 일본, 엔저효과 안 통하자 고집 꺾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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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만엔권 엔화. AFP 연합뉴스

1만엔권 엔화. AFP 연합뉴스

국채금리 상한선 0.5% 인상 왜?

엔저로 수출가격 경쟁력 누렸지만
최근 공급망 붕괴 등에 효과 못봐
수입물가는 치솟아 국민들만 고통 

일본은 그동안 미국이 금리를 올릴 때마다 저금리를 고수해 왔다. 노림수가 있었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벌어질수록 미 달러화 대비 엔화 환율이 급등한다. 이른바 고환율 정책을 위해서다. 고환율은 수출 경쟁력을 높여준다. 일본은 저환율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다. 1985년 미국 등 선진 5개국은 일본의 경제력을 통제하기 위해 플라자 합의를 밀어붙여 당시 달러당 300엔을 넘나들던 엔-달러 환율을 100엔에 가깝게 급격히 끌어내렸다.

이때부터 일본 경제는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엔고(高) 상황에서는 일본 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진다. 더구나 마침 한국이 강력한 제조업 국가로 떠오르면서 일본은 엔고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 재계는 끝없이 엔고 탈피를 요구했고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이 요구에 부응해 엔저(低)를 유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고환율 방치 땐 한국이 GDP 역전할수도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전 세계가 뒤쫓아 금리를 올린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벌어지면, 글로벌 투자자금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신흥국의 통화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개방 체제의 한국이 대표적이다. 환율 폭등을 피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본은 199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제로(0)금리를 금융정책으로 채택했다. 미국이 금리를 올려도 일본은 제로금리를 유지함으로써 오히려 엔-달러 환율 상승을 즐겼다. 엔저가 되면서 일본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졌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하지만 최근 일본은 저금리의 한계에 직면했다. 미·중 경제전쟁의 여파로 글로벌 공급망에 금이 가면서 엔저에 따른 고환율의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면서다(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더구나 일본은 지난 30년간 중국 투자 붐에 편승하고 엔고의 고통도 덜기 위해 해외 진출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 고환율 상황이 찾아와도 수출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됐다.

고환율에도 수출은 안 되고 수입물가만 치솟자 물가가 뛰면서 국민의 고통만 늘어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급기야 지난 10월 20일 엔-달러 환율이 150엔대로 뚫고 올라가자 엔화는 날개 없는 추락을 했다. 일본 정부는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은행은 미 재무부의 용인을 받아 즉각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이 150엔을 넘지 않도록 총력을 쏟았다.

일본은행이 지난 18일 전격적으로 국채 10년물의 금리 상한선을 0.25%에서 0.5%로 인상한 것은 이 같은 고민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초저금리 정책을 수정할 것이란 시그널을 보낸 뒤 며칠 만에 단행된 조치였다.

내년 4월 구로다 일본은행 총리의 퇴임 이후로 예상됐던 제로금리 정책의 전환이 훨씬 앞당겨진 것은 제로금리를 고수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판단에 이르렀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웨덴의 경우도 마이너스 금리까지 가는 초저금리 정책을 시행했으나 성장률 둔화와 집값 상승만 초래하는 등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커지면서 2019년 초저금리 정책에서 탈출했다.

더구나 일본이 고환율을 방치하면 1~2년 내 1인당 국민소득(GDP)이 한국에 역전당하는 상황을 앞당길 수 있다. 국민소득은 미 달러화로 환산하기 때문에 환율이 과도하게 치솟으면 쪼그라들게 된다.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면 일본 집권당은 경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제로금리를 벗어던질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지난 10월 21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엔-달러 환율이 표시되고 있다. 엔-달러 환율은 전날 달러당 150엔을 돌파하면서 엔화 가치는 1990년 8월 이후 3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뉴시스

지난 10월 21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엔-달러 환율이 표시되고 있다. 엔-달러 환율은 전날 달러당 150엔을 돌파하면서 엔화 가치는 1990년 8월 이후 3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뉴시스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일본의 제로금리 탈출은 일본의 잠자는 본능을 깨울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고환율에 의존해 온 일본은 잃어버린 30년 동안 혁신과 변화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제로금리를 벗어던진다면 일본 기업의 ‘애니멀 스피릿’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고환율에 의존하지 못하게 된 만큼 일본 기업들은 진검승부에 나서야 한다.

제조업에서도 그런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한국에 반도체 주도권을 내준 일본은 권토중래를 모색하고 있다. 미·일 양국의 최고 기업들이 힘을 합쳐 일본 반도체 드림팀인 라피더스를 설립하고 2027년부터 2나노미터(㎚, 10억분의 1m)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로 했다. 한국은 지난 24일 반도체법이 통과됐지만, 설비투자에 대한 세액공제가 당초 20%에서 8%로 쪼그라들었다.

“재정건전성 없인 금리 정상화 정책 한계”

다만 일본의 제로금리 탈출이 순탄할지는 미지수다. 금리가 오르면 국채가격 하락을 자극할 수 있어서다. 일본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64%에 이르는 국가채무를 짊어지고 있다. 금리가 오르면 자칫 과도한 감세 정책으로 투기꾼들의 공격을 받은 영국 파운드화·국채 투매 사태의 일본판을 걱정해야 할지 모른다. 미즈호 파이낸셜그룹 기하라 마사히로(木原正裕) 사장은 25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장기금리가 3%나 4%로 오르면 일본 경제에 재앙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니혼게이자이는 “결국 재정건전성 확보 없이는 일본의 금리 정상화 정책도 한계에 부닥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진퇴양난은 국가 경영에 재정건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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