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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소비도 이젠 시들”…고금리·고물가에 소비도 얼어붙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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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오후 7시에 찾은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한 호프집. 크리스마스를 3일 앞둔 연말이지만, 10개 탁자의 절반 정도만 손님이 있었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9년만 해도 이 가게의 연말 예약은 두 달 전에 마감됐었다. 송년회를 즐기려는 대학생들이 몰려들어서다. 이 가게 사장인 곽모(42)씨는 “1년 중 연말, 특히 이 시기는 대목 중의 대목인데 당혹스럽다”며 “앞으로 손님이 계속 줄 것 같아 업종 변경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호프집 주변에는 음식점ㆍ술집 10여곳이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테이블 절반 이상 손님이 차있는 곳은 3~4곳에 불과했다. 곽씨는 “강남역이나 홍대 같은 대형 상권을 빼면 연말 매출이 크게 늘어난 상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최근 수출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방파제’ 역할을 하던 소비가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완화 이후 반짝했던 ‘보복 소비’도 주춤해지면서 이른바 ‘연말 대목’ 기대감도 사그라들고 있다.

25일 한국은행의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86.5로 전월(88.8)보다 2.3포인트 하락했다. 2개월 연속 내리막이다. CCSI가 100보다 낮을수록 소비를 줄이려는 심리가 강하다는 의미다. 통계청 산업활동동향을 봐도 10월 소매판매액지수는 전달보다 0.2% 감소한 120.4로, 두 달 연속 감소세다. 백화점ㆍ마트 등에서 물건을 구매한 수요가 줄었다는 의미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2분기보다는 3분기, 3분기보다는 4분기 소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이달 자영업자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선 68.6%가 ‘올해 매출이 작년에 비해 감소했다’고 답했고, ‘올해 순익이 작년 대비 감소했다’는 응답은 69.6%로 나타났다. 평균적으로 올해 매출은 전년 대비 12.5%, 순익은 12.4%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사실 3분기까지 국내 경기가 9개 분기 연속 성장세를 이어가며 체면치레를 한 데는 민간소비의 공이 컸다. 지난 3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 대비 0.3% 성장했는데, ‘순수출’은 기여도가 -1.8% 포인트로 크게 떨어졌다. 반면 민간소비가 0.8%포인트를 기록하며 설비투자(0.7%포인트)와 함께 한국이 역성장을 모면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고금리ㆍ고물가 한파가 본격화하며 소비자들은 빠르게 지갑을 닫고 있다.  제품 가격은 오르고, 이자 부담도 커졌는데, 돈벌이는 제자리걸음을 걸으면서 실질소득이 줄어든 여파다.

경기도 용인시 동천동의 한 네일숍은 4만원이던 손톱 젤 가격을 3만5000원으로 내리고 2만원씩 받던 핸드케어는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포인트 적립 비율은 기존 결제금액의 10%에서 20%로 올렸다. 네일숍 사장 김모(34)씨는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것이 외모 치장”이라며 “올해는 그나마 코로나19 지원금이라도 있었는데, 내년 한 해를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옆 가게 미용실은  20만원을 받던 파마 가격을 50% 인하한다는 홍보지를 내걸었지만, 가게는 한산했다.

소비가 주춤하면서 기업 창고에는 안 팔린 물건들이 쌓이고 있다. 올들어 3분기까지 국내 30대 주요 상장사의 재고자산은 180조 원을 넘어 사상 최대다. 반도체 공급난에 따른 신차 생산 차질로 한때 콧대를 높였던 중고차 시장은 매수세가 줄면서 매물이 쌓이고 있다.

소비 위축 조짐에 유통ㆍ소비재 업계도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가전양판업계1위 업체인 롯데하이마트는 코로나19가 확산한 2020년 창립 이후 첫 희망퇴직을 실시한 이후 이달 초 두 번째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롯데면세점도 이달 전체 직원의 15%에 이르는 직원을 대상으로 창립 이후 첫 희망퇴직을 받았고 푸르밀(11월), 하이트진로(10월), 오비맥주(9월) 등도 3분기에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한국은행은 최근 BOK이슈노트에서 “민간 소비는 소비심리가 악화한 가운데 고물가에 따른 실질구매력 저하, 금리 상승 등으로 증가세가 둔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당분간 사정이 달라지기도 힘들다. 정부는 내년 물가상승률을 3.5%로 예상하고 있다. 올해를 제외하면 2008년(4.7%) 이후 가장 높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행진은 내년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전경련은 내년 가계 소비지출이 올해보다 평균 2.4%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경련이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을 넘는 56.2%는 내년 소비지출을 올해보다 축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비지출을 축소하는 주요 이유로는 43.9%가 물가 상승을 꼽았다. 이어 실직 및 소득 감소 우려(13.5%), 세금공과금 부담(10.4%), 채무 상환 부담(10.3%) 등의 순이었다.

수출은 꺾이고, 기업은 투자계획을 축소하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를 지탱하던 민간소비가 둔화 조짐을 보이는 것은 경기가 더 빠르게 침체할 수 있다는 불안한 신호다. 하지만 마땅한 정책적 해법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소비를 늘릴 내수 부양책을 내놓았다간 물가 상승을 부채질할 수 있어서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소비 심리 악화의 근본적인 이유는 자산 가치 하락과 실물경기 침체에 따른 체감 소득 감소”라며 “금리의 가파른 상승, 부동산ㆍ주식 등 자산 가격의 급격한 하락이 멈춘다는 확실한 신호가 없다면 소비 침체는 내후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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