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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집 피해 러 탈출…"머핀으로 끼니" 인천공항서 사는 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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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이(왼쪽)과 쟈샤르는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3층 46번 게이트 부근에서 살고 있는 ‘공항 난민’ 이다. 지난 22일 안드레이와 쟈샤르가 창밖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항공기를 바라보고 있다. 왕준열 PD

안드레이(왼쪽)과 쟈샤르는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3층 46번 게이트 부근에서 살고 있는 ‘공항 난민’ 이다. 지난 22일 안드레이와 쟈샤르가 창밖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항공기를 바라보고 있다. 왕준열 PD

“곧 크리스마스인데…가족들은 어떻게 지낼 지….”
 지난 22일 오후 2시쯤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3층 46번 게이트. 러시아에서 온 안드레이(가명·30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한참 창밖으로 항공기가 이륙하는 모습을 바라본 뒤였다. 두 달 전부터 인천공항에서 사는 그는 하루에도 몇번씩 이륙장면을 보러 간다고 했다.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공항을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함을 달랠 수 있어서다. 안드레이는 러시아어 통역과 함께 진행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머핀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화장실에서 옷을 빨고 불편하게 잠을 잔다”며 “끔찍하고 막막한 공항 생활을 견딜 수 없다. 고국의 가족이 보고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드레이의 고향은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다. 고려인이 많이 사는 중앙아시아와 접해 있다. 가족과 함께 장사하던 그의 삶은 올해 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를 지지하는 시위에 참여하면서 급변했다. 시위에 나서고 며칠 뒤, 광장을 걷다가 경찰에 연행됐고 이름 모를 장소로 끌려갔다. 6시간에 걸쳐 조사를 받았는데 “시위에 나서지 말라”는 협박과 함께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턱과 코가 부러져서 수술을 받았어요. 그래도 살아서 풀려났어요.” 벌금 처분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누가 부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고 한다.

안드레이는 니발니를 지지하는 시위에 참석한 후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당시 구타를 당했고 코를 다쳤다고 한다. 사진 안드레이

안드레이는 니발니를 지지하는 시위에 참석한 후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당시 구타를 당했고 코를 다쳤다고 한다. 사진 안드레이

잊혀가던 아픈 기억은 지난 9월 21일 징집소환장을 받으면서 되살아났다. 푸틴이 전체 예비군 2500만 명 중 30만 명을 징집하겠다는 부분 동원령을 내린 데 따른 조치였다. 소환장을 받아 든 안드레이는 ‘나는 블랙리스트라 입대하면 최전선으로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평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해왔다고 한다. “소환장 서명 후 징집을 거부하면 처벌(최대 징역 10년)을 받고 서명을 거부하고 도망치면 수배자가 된다”는 등 곳곳에서 흉흉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사는 지인 6명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사망했단 소식에 불안은 커졌다.

안드레이는 지난 9월 21일 입대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사진 안드레이

안드레이는 지난 9월 21일 입대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사진 안드레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탈출이었다. 하늘길 대신 감시망이 허술한 육로를 택했다. 지난 9월 말 기차를 타고 러시아-카자흐스탄 국경을 넘었다. 출국 심사에서 잡혔지만 1000달러를 건네자 눈감아줬다고 한다. 독일 dpa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가 예비군 동원령을 내린 뒤 최근까지 카자흐스탄과 핀란드 등으로 탈출한 러시아 남성은 30만명을 넘어섰다. 러시아 정부의 손길이 닿을까 두려웠던 안드레이는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올해 봄에 받은 K-ETA(한국 전자여행 허가)가 있었고 고려인 등 인연이 있는 나라니까….”

하지만 입국장은 열리지 않았다. 지난 10월 초 법무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은 안드레이를 난민 인정심사에 회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안드레이가 ‘경제적인 이유로 난민 인정을 받으려는 등 난민 인정 신청이 명백히 이유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안드레이는 공항에 남기로 했다. 공익법인센터 어필의 도움을 받아 “난민신청불회부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6일 첫 재판에서 재판부가 다음 달 10일 변론기일을 한 차례 더 열겠다고 하면서 안드레이는 ‘공항 난민’으로 새해를 맞게 됐다. 안드레이는 “매일 러시아에 있는 가족과 친구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제가 잘못된 전쟁에 끌려가지 않게 난민인정심사를 받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입영 피해 한국행”…32일째 ‘공항 난민’ 전직 축구선수

안드레이와 쟈샤르는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법무부 출국대기실에서 머무르고 있다. 머핀과 기내식이 식사로 제공된다고 한다. 사진 쟈샤르

안드레이와 쟈샤르는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법무부 출국대기실에서 머무르고 있다. 머핀과 기내식이 식사로 제공된다고 한다. 사진 쟈샤르

 러시아에서 온 쿠비예프 쟈샤르(31)도 32일째 인천국제공항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러시아 카라차예프스크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지난달 7일 러시아 군 징집위원회로부터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고 했다. “고령의 할머니를 돌봐야 하고 군 복무 대상자도 아닌데 왜 이런 통보를 하느냐”고 맞섰지만, 서명을 강요받았다는 게 쟈샤르의 주장이다. 전쟁을 반대했던 그 역시 카자흐스탄을 거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들어와 지난달 21일 난민인정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쟈사르의 거부 처분에는 안드레이와 같은 이유 외에도 “대한민국의 안전 또는 사회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등의 이유가 덧붙었다.

부분 동원령 피해 탈출, 난민 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모두 “잘못된 전쟁에 끌려나가지 않도록 난민인정심사를 받게 해달라”며 소송의 결과를 초조한 맘으로 기다리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 지난 3월부터 11월까지 국내에서 난민신청을 한 러시아인은 891명이다. 지난해(45명)에 비해 많이 늘어난 숫자다. 러시아인 난민신청이 급증하지만, 아직 국내에서 난민 지위가 인정받은 사례는 없다. 법무부 관계자는 “올해 난민 신청자 대부분에 대한 심사가 아직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이종찬 변호사는 “‘징집거부는 난민 인정 사유가 아니다’라는 게 법무부가 이들에게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를 봉쇄하는 이유”라며 “국제적 비난을 받는 자국의 침략 전쟁에 반대해 징집을 거부하는 건 단순한 병역기피가 아니라 정치적 의견에 의한 난민이므로 난민 인정심사를 받을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익명을 요구한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징집을 피해 한국에 온 러시아인을 난민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 간 문제에 연루될 우려가 있다. 학계에선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난민인정 신청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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