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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중이온가속기, 빅뱅 비밀 풀고 신물질 도전 ‘가속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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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호 18면

[최준호의 첨단의 끝을 찾아서] 홍승우 중이온가속기연구소장

우리 ‘몸’은 무엇으로 구성돼 있을까. 몸무게가 70㎏인 성인이라면 산소가 43㎏, 탄소 16㎏, 수소 7㎏, 질소 1.8㎏ 등 4개의 원소가 몸의 96%를 차지한다. 이 외에 칼슘과 인·칼륨·황·염소·마그네슘·철, 이렇게 8개 원소가 3%를 구성한다. 나머지 1%에는 납·수은·우라늄·토륨·카드뮴 등 수십 개의 원소들이 극미량으로 들어 있다. 우리 몸은 빅뱅과 별의 흔적이다. 우주 탄생 당시 처음 생성된 수소와 헬륨, 그리고 가벼운 별들이 합쳐지고, 폭발하는 과정에서 핵융합으로 생겨난 무거운 원소들이 또 별을 만들고, 억겁(億劫)의 세월을 지나 생명을 낳았다.

북대전의 끝. 유성구 국제과학로 1번지에 자리 잡은 중이온가속기연구소(라온)는 이런 우주와 생명 탄생의 비밀에서부터 산업용까지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첨단 연구시설이다. 중이온가속기는 2011년 12월 사업을 착수한 지 11년만인 지난 10월 처음으로 시험가동에 성공했다. 여기까지 총 1조5183억원이 투입돼 ‘단군 이래 최대 과학사업’이란 별칭까지 붙었다. 홍승우 연구소장과 함께 중이온가속기 현장을 둘러봤다. 축구장 137개 면적이라는 95만여 ㎡(약 28만8000평) 부지에 거대한 연구소 시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일본, 방사광가속기만 수십 대 달해

홍승우 중이온가속기연구소장이 연구소 내 가속기동 지하 1층에 설치된 길이 80m의 중입자 입사기 앞에 섰다. 입사기는 초전도가속관으로 들어갈 저에너지의 중이온을 만들어내는 첨단장비다. 김성태 객원기자

홍승우 중이온가속기연구소장이 연구소 내 가속기동 지하 1층에 설치된 길이 80m의 중입자 입사기 앞에 섰다. 입사기는 초전도가속관으로 들어갈 저에너지의 중이온을 만들어내는 첨단장비다. 김성태 객원기자

본관을 바라보는 정문에 들어서니 ‘우주와 물질의 근원을 밝힌다’라고 쓴 입석이 눈에 들어왔다. 본관 뒤 동산 너머에 자리 잡은 가속기동은 길이가 500m에 달하는 거대한 시설이었다. 한쪽으로 높이 25m의 흰색 헬륨탱크 8기가 솟아 있었다. 섭씨 영하 270도에서 가동되는 초전도가속관을 위한 필수 냉각시설이다. 깊이가 10m에 달하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길이가 80m에 달하는 가속관이 뻗어 있었다. 향후 이런 가속관이 최대 400m 가까이 이어진다. 중이온을 빛의 속도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기 위한 장치다. 문 밖으로 노랑과 주황의 방사선 마크가 선명했다. 가동 중에는 X선이 뿜어져 나오는 ‘방사선 위험구역’이었다.

중이온은 뭐고, 중이온가속기는 뭔가.
“우선 원자(atom)부터 시작해보자.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를 원자라고 한다. 원자의 중심에 양(+)전하를 띠는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를 음(-)전하를 띠는 전자가 움직이고 있다. 원자핵은 또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져 있다. 원자는 중성의 상태에 있는데, 원자가 전자를 잃거나 얻어서 전기를 띠게 되면 이온이라고 부른다. 중이온(heavy ion)은 원소기호 1번과 2번인 수소나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의 이온을 말한다. 중이온가속기 라온은 이런 중이온을 빛의 속도의 절반 수준으로 가속한 뒤 표적에 충돌시켜,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자연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 희귀한 동위원소를 만드는 거다.”
중이온을 왜 가속하나.
“원소의 기원을 이해하자는 것이 중이온가속기 구축의 우선적인 목적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원소들이 우주의 어디에서 만들어져 지구로 왔는지를 밝히려는 거다. 대부분의 과학자는 초신성 폭발 또는 중성자별 중합 과정에서 원소들이 만들어져 지구에 왔다고 생각한다. 초신성 폭발이 일어날 때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중심부에서 매우 다양한 핵반응이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그 순간에 수많은 희귀동위원소가 생겼다가 붕괴하면서 사라진다. 원소의 기원을 이해하려니, 초신성 폭발 같은 과정에서 일어나는 희귀동위원소들의 핵반응을 이해해야 한다.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동위원소를 만들어서 별에서 일어나는 핵반응을 재현하려는 거다. 그런 희귀동위원소를 만들려면 중이온을 아주 빠른 속도로 가속해서 어떤 물질에 때려야 한다.”
이제 막 선진국 초입에 들어선 한국에 지나친 시설이란 주장도 있는데.
“중이온가속기를 흔히 ‘기초과학의 꽃’이라고 부른다. 과학기술 선진국이라면 있어야 하는 필수 시설이다. 이제 차츰 옛날이야기가 되고 있지만, 외국 유학을 한 과학자가 한국으로 돌아오면 중이온가속기 같은 기초과학시설이 없다 보니 과학 커뮤니티에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반면 선진국에 남은 동료는 그곳 첨단 시설에서 연구하면서 업적을 내고 성장하고 학계 리더가 된다. 기억하시겠지만, 예전에 ‘한국엔 잔디구장도 없는데 어떻게 월드컵에 나가길 바라느냐’는 말이 있었다. 중이온가속기는 과학자들의 잔디구장 같은 거다. 여기에서 굉장히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다.”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어떤 연구를 할 수 있나.
“우주에 존재하는 4개의 힘이 있다. 중력·전자기력·약력·핵력이 그것이다. 이 중 핵력은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물질의 근본인 핵이 어떤 모양으로 되어 있는지, 그 안에 어떤 성질들이 들어 있는지, 이런 걸 이해하기 위한 기초과학 연구 시설로서 가속기가 필요하다. 이 밖에도 의료용 동위원소 생성과 신소재 개발 분야까지 두루 쓰인다.”
국내에 다른 가속기도 있지 않나.
“경주에 양성자가속기, 포항공대엔 방사광가속기가 있다. 양성자가속기는 처음엔 원자력 분야 연구개발에 사용하려고 시작한 것인데, 이후 정치외교적 이유 때문에 목적이 달라졌다. 지금은 양성자를 가속해 중성자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으로 물성 연구를 많이 한다. 반도체·자동차·극한환경소재·의료·바이오 등 다양한 분야에도 활용된다. 포항방사광가속기는 글자 그대로 방사광 즉, 빛을 내는 거다. 여기서 얘기하는 빛은 자외선과 X선이 주종이다. 이곳 역시 기초연구는 물론, 응용분야인 반도체·디스플레이·철강·바이오신약·촉매·나노정밀소자·2차전지·ESS·신소재 개발 등 모든 과학 분야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충청북도 오창에도 방사광가속기를 짓지 않나.
“1조원대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구축사업이다. 신규 방사광가속기는 산업지원이 첫째 목적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사업공고의 제목에서 ‘산업지원 및 선도적 기초 원천 연구 지원을 위한 다목적 방사광가속기’임을 명시하고 있다.”
좁은 나라에 가속기가 너무 많은 건 아닌가.
“포항 방사광가속기는 이미 성능과 시설 용량 면에서 한계에 달했다. 예전과 달리 이제 우리의 과학 수준이 높아졌다. 산업분야 관련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지금 포항가속기 이용자들의 신청 경쟁률이 3대 1에 달할 정도다. 수요를 다 못 받아주고 있다. 그래서 다시 더 크게 하나 만들자는 게 오창의 다목적 방사광가속기다. 일본의 경우 방사광가속기가 수십 대에 달한다. 재료나 바이오 연구하는 사람들, 나노 연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이런 방사광가속기는 필수다.”
다시 중이온가속기로 돌아가자. 그간 일정이 많이 지연됐다.
“중이온가속기 사업은 2011년 12월에 시작됐다. 이후 기본계획 변경에 따라 지난해 연말까지 최종 완공하게 했는데, 당시 초전도가속기의 저에너지 구간만 설치 완료됐다. 중이온을 광속의 10분의 1 수준으로 가속하는 구간이다. 그래서 올해 연말까지를 1단계 사업으로 하고, 광속의 절반까지 속도를 끌어올리는 고에너지 구간을 2단계 사업으로 미루게 됐다. 일단 저에너지 구간은 완공되었으니, 사업단에서 연구소로 체제를 바꾸고, 저에너지 구간의 활용을 준비하고 있다.”
중이온가속기가 최종 완성되는 건 언제인가.
“고에너지 구간의 완공 시기는 아직 미정이지만, 대략 2029년 정도가 돼야 가능할 것 같다. 2단계 사업에 들어가는 초전도가속관의 연구개발(R&D)이 아직 안 끝났다. 지금도 시제품을 만들고 있고 시제품 일부는 성공했는데, 양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능 향상이 필요하다. 산업체가 제작하기 위해서는 수율이 좋아야 하는데, 아직 수율이 충분히 좋지 않다. 그렇지만 최대한 빨리 완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프랑스 전문가 “한국 가속기 성능 뛰어나”

7년 이상 늦어진단 얘기다. 왜 이렇게 많이 늦어지나.
“비판을 많이 듣고 있다. 초전도가속관 기술이 부족하다 보니 그런 거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월드컵 16강에 올라도 8강에 진출하는 건 힘들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세계 1위에 도전하는 거다. 절차적 문제도 있다. 선행 R&D라고 하는 것을 2025년까지 하게 돼 있는데. 이게 끝나면 또 적정성 재검토나 예비타당성 조사에 들어가야 된다. 그게 또 6개월이나 1년 걸린다.”
기술적으로 어떤 점이 가장 어렵나.
“초전도가속관을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 어려움이 크다. 포항가속기와 경주 양성자가속기 건설 경험이 있었기에 많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이런 가속기들은 상전도 가속관을 쓴다. 중이온가속기는 영하 270도 정도에서 가동되는 초전도 가속관을 사용한다. 또한 포항가속기는 전자를 가속하는 것이고, 양성자가속기는 양성자를 가속하는데, 양성자는 전자보다 무겁긴 하지만, 중이온에 비해 훨씬 가볍다. 그만큼 중이온을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하는 건 어려운 기술을 필요로 한다.”

(전자의 질량을 탁구공(2.5g)의 질량으로 본다면, 양성자는 탁구공의 2000배인 볼링공(5㎏), 중이온은 탁구공의 40만배인 1t짜리 승용차와 같은 수준이다.)

마침 중이온가속기연구소를 방문했다가 동행한 나빈 알라하리 프랑스 대형중이온가속기연구소(GANIL) 전 소장이 거들었다. 그는 “한국이 중이온가속기를 처음으로 건설하는데, 당초 계획이 매우 도전적이었기 때문에 일정 지연이 있는 것 같다”며 “이런 규모의 대형 시설은 대부분 흔히 공사지연이 발생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중이온가속기는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지만, 운영과 연구 인력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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