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설] 우리 정치의 경쟁력 드러낸 늦장 예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19호 34면

윤석열 정부 국회 설득 노력은 충분했나

거대야당은 좀 더 책임 있는 자세 보여야

협치는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 모두 책임

‘지각 타결’이지만 최악은 피했다. 그제 여야가 내년도 예산안과 예산 부수법안에 합의했다. 사상 초유의 준예산 사태나 헌법이 정한 정부의 예산편성권을 무시하는 거대 야당의 수정안이 일방적으로 통과되는 일은 일단 면했다. 하지만 법정 처리기한(12월 2일)을 3주나 넘겼고 2014년 국회선진화법이 시행된 후 최장 지연이라는 불명예 기록을 남겼다. 내년 나라 살림과 국가 장래를 위한 합리적인 토론 대신 정치적 이해득실을 지나치게 따지는 볼썽사나운 장면이 연출됐고, 결국 정부·여당과 거대 야당 간 주고받기식의 어정쩡한 타협에 그쳤다.

최대 쟁점이었던 법인세 인하는 현행 과세표준 4개 구간별로 1%포인트씩 세율을 낮췄다. 정부안에 비해 전체적인 감세 규모는 줄었다. 세금 많이 내는 초대기업 감세가 줄었기 때문이다. 정부·여당은 ‘그래도 감세’라는, 야당은 ‘부자 감세 축소’라는 기존 방어선을 어느 정도 지켰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1%포인트로는 법인세 인하 효과가 크지 않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1%포인트 낮췄다지만 최고세율 24%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1.6%)에 비해 여전히 높다. 종합부동산세는 정부안이 많이 반영됐다. 문재인 정부가 2019년 다주택자를 겨냥해 종부세를 중과한 지 3년 만에 징벌적 과세를 되돌릴 수 있게 됐다.

야당이 ‘시행령 예산’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던 행정안전부 경찰국과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 운영경비 예산은 절반 감액으로 합의됐다. 경찰국과 인사정보관리단은 민정수석실을 폐지하며 대통령실 권한을 부처에 이양한, 새 정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직이라는 점에서 야당의 무조건 반대는 지나치다는 지적이 일었다. 정부안에는 없었던 지역사랑상품권(3525억원)은 추가됐다. 역시 민주당이 원했던 공공임대주택 관련 전세임대 융자사업도 6600억원 증액됐다. 이런 ‘이재명표 예산’이 1조원 정도 추가됐다. 민주당도 실속은 챙긴 셈이다.

아직 남은 과제가 있다. 올해 말 종료되는 30인 미만 사업장의 8시간 연장근로 허용, 화물차 안전운임제 같은 일몰조항이다. 특히 소규모 사업장의 연장근로 허용은 중소기업계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점에서 일몰 연장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산안 늦장 합의는 우리 정치의 뒤떨어진 문제해결 능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정부가 며칠 전 야심차게 발표한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에는 거대 야당의 협조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정책이 여럿 들어있다. 다주택자의 취득세·양도세 중과를 풀거나 아파트 매입임대를 부활하는 정책 등은 대부분 법 개정이 필요하다.

정부와 여야 모두 달라져야 한다. 정부가 일단 발표해놓고 국회에서 바뀌는 정책이 한둘이 아니다. 이래선 정부와 정책에 대한 국민 신뢰가 생길 수 없다. 경제 정책의 불투명성은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과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이어진다. 여야의 극렬한 대치 탓이라고 핑계만 댈 일이 아니다. 정부 부처는 정책을 준비하면서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과도 충분히 소통하면서 국회와의 접점을 넓혀야 한다.

집권 경험이 있는 거대 야당은 좀 더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경제 위기 극복과 민생 현안을 위해 정부·여당과 함께할 일이 적지 않다. 여당은 ‘거대 야당에 짓눌린 소수 여당’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약 준예산이나 야당 수정예산안 같은 막장까지 갔다면 거대 야당의 ‘몽니’, 집권 여당의 ‘약자 코스프레’, 대통령의 소통능력 부족 등의 비판을 모두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협치의 책임은 윤석열 대통령과 여야 모두에게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