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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파일] 왜 진도준인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19호 35면

유주현 문화부문 기자

유주현 문화부문 기자

“엄만 누구 편이야?” 대망의 ‘음·메 대전’을 보기 위해 TV 앞에 앉았을 때 아이가 물었다. ‘내 마음 나도 몰라’였지만, 경기가 진행되자 메시가 앞서갈 때 안심하고 있다가 음바페의 반격에 불안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 무의식은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인 데다 첫사랑 일편단심이라는 남자의 ‘라스트 댄스’로 기울었고, 새파랗게 어린 초능력자에겐 감정이입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초능력자 ‘재벌집 막내아들’에겐 마음을 뺏겼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지난주 14회차에서 24.9%를 찍으며 올해 최고 시청률 드라마에 등극했다. 올여름 돌풍의 주인공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17.5%를 가볍게 제꼈다. 각종 송년회에서도 ‘재벌집’ 이야기로 대동단결이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사진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사진 JTBC]

대기업 오너 일가의 비자금 탓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머슴’이 인생 2회차를 살며 복수를 감행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우리가 왜 열광할까. 송중기와 이성민의 미친 존재감은 논외로 하고, 원작인 웹소설 판타지 장르의 클리셰인 ‘회빙환’, 즉 차원이동 마스터플롯이 대중문화를 점령한 현상을 주목하고 싶다. 웹소설은 자투리 시간에 소비되는 스낵컬처지만, 순간적인 몰입과 자극이 최상의 가치가 된 요즘 세상에선 그 히어로가 대중의 현실 인식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원작대로라면 진도준은 혼자만 미래를 아는 초능력을 발휘해 피도 눈물도 없는 머니게임 끝에 세계 최고 부자가 되어 오너일가를 박살 내고 순양그룹을 차지할 예정이다. 이런 ‘초’능력주의는 다른 웹소설에서도 발견된다. 가장 성공한 웹소설로 꼽히는 『전지적 독자 시점』 『나 혼자만 레벨업』도 희망 없는 삶을 살던 주인공이 갑자기 차원이동을 한 다음, 혼자만 게임의 법칙 위에서 플레이하는 ‘반칙’으로 승리하는 판타지다.

이런 판타지의 득세는 대중의 ‘이생망’ 정서를 반영하고 있지만, 현실도피라 단정할 순 없다. 적어도 ‘재벌집’은 현실개선의 의지가 있다. IMF 위기, 신용카드 대란 같은 굵직한 한국 현대사를 되짚으며 과거 기득권층의 못된 선택을 꼬집는다.

그런데 사회고발 드라마처럼 거대악에 맞서 정의를 구현하는 게 아니라, ‘눈에는 눈, 돈에는 돈’이라 재미있다. 주주 이익은 팽개치고 편법 승계에 올인하는 재벌의 비윤리를 비꼬면서도, 그 테크닉을 AI처럼 학습하고 진화시켜 맞짱 뜨는 대놓고 속물적인 복수극에 쾌락이 극대화된다.

드라마에선 다소 완화됐지만, 원작의 진도준은 과정의 정당성이나 진정성 따위 아랑곳없다. 대신 ‘충성은 병신 같은 노예 근성이다’ ‘헌신하다가 헌신짝 된다’는 직설적인 대사들로 속물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권력을 향해 억지 예의 한 스푼도 없는 ‘싸가지 없음’으로 응수할 땐 ‘사이다’가 한 트럭이다. ‘노예’ 또는 ‘헌신짝’의 소심한 복수심이 보상받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웬만해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극중 진도준도 초능력을 발휘해 봤자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자기 몫의 선택이 있을 뿐이란 걸 깨닫고 거침없이 ‘돈에는 돈’으로 질주하고 있다. 이런 초능력자에게 우리가 열광하는 것도, 각자도생만이 살 길임을 똑바로 알게 됐기 때문인 것 같다. 국가도, 회사도 나의 미래를 돌봐 주지 않는 세상에서, 감동 아닌 쾌감을 쫓고 있는 나 자신을 진도준에게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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