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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훈장' 그날부터 꼬였다...尹 분노 부른 '배당금의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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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 발언으로 논란 부른 월드컵 배당금의 진실

카타르 월드컵 16강을 달성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지난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셀카를 찍고 있다. [뉴스1]

카타르 월드컵 16강을 달성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지난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셀카를 찍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 2022 카타르 월드컵 배당금 얘기를 또 꺼냈다. 윤 대통령은 “스타 비즈니스가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정당한 보상 체계를 갖춰야 한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제대로 보상받았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나흘 전인 9일 경제단체장 비공개 만찬에서는 “고생은 선수들이 했는데 왜 축구협회가 배당금을 더 많이 가져가느냐”며 대한축구협회를 직격했다. 축구협회가 선수들이 받아야 할 몫을 빼앗았다는 뉘앙스다. 화들짝 놀란 정몽규 축구협회장(HDC그룹 회장)이 곧바로 사재 20억원을 선수단 격려금으로 내놨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축구협회를 향해 2차 레이저를 쏜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월드컵 16강 축하만찬에 문체부장관·축구협회장 패싱→2023 아시안컵 유치 실패→축구협회의 스포츠외교 참패로 거슬러 올라가는 스토리다.

카타르 월드컵 16강 포상금에 대한 팩트 체크를 위해 지난 20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을 찾았다. 전한진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과 이정섭 경영본부장이 자료를 준비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억울하다기보다는 뭔가 오해가 있다는 생각이다. 대통령께 정확한 자료와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께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선수당 평균 3억, 일본·호주보다 많아

이정섭 본부장은 “국제축구연맹(FIFA)의 월드컵 배당금은 골프나 테니스 대회에서 입상자에게 주는 상금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월드컵 배당금은 FIFA가 각 나라 FA(축구협회)의 과거-현재-미래를 보고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란 월드컵 대륙별 예선을 준비하고 치르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을, ‘현재’는 월드컵 본선을 치르는 경비를 말한다. ‘미래’란 4년 뒤 다음 월드컵을 위해 대표팀을 운영하고 유소년 육성과 축구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 본부장은 “KFA는 FIFA로부터 총 1300만달러(약 175억원)의 배당금을 받았다. 대륙별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한 몫으로 900만달러를 받았고, 16강에 올라 400만달러를 더 받았다. 이 배당금의 54.6%인 95억원을 선수단 포상금으로 책정했다”고 말했다. 이 비율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38.7%), 2018년 러시아 월드컵(45.4%) 때보다 높다. 또 아시아축구연맹(AFC) 소속으로 카타르 월드컵 16강에 나란히 올라간 호주(43.1%), 일본(50.0%)보다 높다. 이번 대표팀 선수 26명은 정 회장의 격려금을 합쳐 각각 2억8000만~3억4000만원을 기여도에 따라 차등 지급받는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은 왜 축구협회를 두 차례나 질타했을까. 시곗바늘을 올해 6월 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돌려보자. 2002 한·일 월드컵 4강 20주년을 기념해 브라질과의 친선경기가 열렸다. 대통령이 손흥민 선수에게 국민훈장 청룡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축구협회가 ‘아시안컵 유치’ 카드를 꺼냈다. 협회를 대표해 이영표 부회장(당시 강원 FC 사장)이 대통령에게 “손흥민이 있을 때 63년 만에 아시안컵을 유치하고 우승에 도전해야 합니다”고 건의했다. 임기 중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 메가 스포츠 이벤트가 없는 윤 대통령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배석한 박보균 문화체육부장관에게 “적극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AFC 집행위원의 투표로 결정되는 아시안컵 개최지 결정은 10월 17일로 예정돼 있었다. 4개월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범정부 차원의 유치위원회가 구성됐고 모두들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한국은 오일 머니를 앞세운 카타르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한진 사무총장은 “갑자기 카타르가 뛰어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에서 짓고 있던 현대 아이파크 아파트 공사 현장 붕괴사고로 안 그래도 코너에 몰려 있던 정 회장은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지난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카타르 월드컵 16강 축하 만찬에 정 회장은 물론 축구협회 직원은 아무도 초대받지 못해 ‘패싱 논란’을 낳았다. 대통령실에서는 “국민들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준 선수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왜 아시안컵 유치에 실패했을까. 그 기저에는 축구협회의 외교력과 정보력 부족이 있다. 1993년부터 2008년까지 16년간 대한축구협회를 이끈 정몽준 회장은 FIFA 부회장 4선(選)을 할 정도로 국제축구계에서 파워가 컸다. 일본의 단독개최로 기울었던 2002년 월드컵을 한-일 공동개최로 돌려놓은 데도 정 회장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2013년부터 10년째 축구협회 수장을 맡고 있는 정몽규 회장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2019년 4월 FIFA 평의회 위원과 AFC 부회장 선거에서 모두 낙선했다. FIFA 평의회 위원 선거에서는 출마자 7명 중 6위에 그쳤고, AFC 부회장 선거에서는 동아시아지역 후보로 나서 국제축구계 변방인 몽골 축구협회장과의 양자 대결에서도 완패했다. 정 회장은 이어진 AFC 집행위원 선거에서는 후보를 자진사퇴했다. 이번 아시안컵 개최지 투표를 한 AFC 집행위원 23명 중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정 회장, FIFA·AFC 선거 잇따라 낙선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지난 9월 2일 2023 AFC 아시안컵 대한민국 유치 알림대사 발대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지난 9월 2일 2023 AFC 아시안컵 대한민국 유치 알림대사 발대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한진 총장은 “6월 2일 대통령께 보고할 때까지는 카타르가 뛰어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6월 30일이 유치 신청 마감일이었는데 28일에 AFC가 7월 15일까지로 연장해줬고 막판에 카타르가 신청했다”고 말했다. 대한축구협회가 AFC의 기류를 전혀 읽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중국은 올해 5월에 2023 아시안컵 개최권을 반납했다. 직전 대회(2019년)는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렸고, 2027년 대회는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유치 경쟁을 하고 있었다. 지역별 안배 차원에서도 동아시아에서 열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카타르와 사우디가 ‘동맹’을 맺었다. 2027년 대회 후보에서 카타르가 빠지고 2023년 카타르 유치를 사우디가 지원한 것이다. 2023 아시안컵(카타르)-2027 아시안컵(사우디)-2030 아시안게임(카타르)으로 이어지는 큰 그림을 그린 것이다.

한국은 아시안컵 스폰서 기업 참여 등 직·간접적인 AFC 지원금으로 4500만달러(약 580억원)를 준비했다. 카타르는 사우디의 도움을 받아 1억1500만달러(약 1500억원)를 베팅했다. 게다가 카타르에는 막 월드컵을 치른 세계 최고 시설의 경기장 8개가 있다. 한국은 ‘축구는 축제다’라는 슬로건 아래 문화·관광 등과 연계한 아시안컵을 제안했다. BTS가 출연한 홍보영상도 만들었다. 그러나 돈 앞에서 명분은 힘을 잃었다.

정몽규 회장은 월드컵 16강을 달성하고도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었다. 파울루 벤투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아 축구팬들의 시선이 따가운 와중에 협회 고위 관계자를 통해 ‘새 감독은 연봉 10억원 이하, 애국심이 있는 국내 지도자’라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현대가(家)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협회의 끼리끼리 문화, 회전문 인사, 현장과의 소통 부재 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최근에는 대학축구 감독들이 한국대학축구지도자협의회(회장 설동식)를 구성했다. 이들은 초·중·고 지도자들과도 연대해 현장의 목소리를 축구협회에 강력하게 전달하겠다고 한다. 안팎으로 시련에 직면한 정몽규 회장이 어떤 돌파구를 찾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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