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가 초음파 진단기기를 활용해 진단에 참고한 행위를 의료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제2의 청진기’로 여겨질 정도로 대중화된 초음파 진단기기를 직접적인 시술 등이 아닌 보조 수단으로 활용한 것을 두고 ‘무면허 의료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취지다.
대법, “기술 발전에 따른 ‘의료행위’ 새 판단 기준 있어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22일 한의사 A씨의 의료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벌금 8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지난 2010∼2012년 한의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며 초음파 진단기기를 이용해 환자의 신체 내부를 촬영하고 이를 토대로 진단을 내리는 등 의료행위를 했다는 이유(의료법 위반)로 기소됐다.
재판의 쟁점은 A씨의 행동을 ‘한의사의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로 볼지 여부였다. 1‧2심은 이를 판단하는 데 있어 대법원이 지난 2014년 2월 판결을 통해 정립한 기준을 활용했다. 관련 법령에 한의사의 해당 의료기기 등 사용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는지와 함께 의료기기 개발・제작 원리가 한의학의 학문적 원리에 기초한 것인지 등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1심은 지난 2016년 2월 A씨에 대해 유죄로 판단하며 벌금 80만원을 선고했다. 1심은 “초음파 진단기기는 서양 의학의 학문적 원리에 기초해 개발·제작됐다”며 “초음파 진단기기를 사용하는 의료 행위가 한의학의 이론이나 원리의 응용 또는 적용을 위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진단은 중요한 의료 행위여서 그 과정에서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판독하지 못하면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 상의 위험을 발생시킬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A씨는 항소했지만, 같은 해 12월 항소심은 이를 기각하며 같은 판단을 내렸다.
반면 대법원은 이날 의료행위 판단 여부에 대한 새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은 “의료 공학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종전과 다른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라며 “한의사가 해당 기기를 진단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게 되면 의료 행위에 통상적으로 수반되는 수준을 넘어서는 보건위생상 위해가 생길 우려가 있는지 등을 봐야 한다”고 했다.
새 기준에 따라 A씨의 행동은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 행위가 아니다’라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대법원은 “의료계에서 초음파 진단기기는 ‘제2의 청진기’로 인식될 만큼 범용성・대중성・기술적 안전성이 담보된다”며 “초음파 진단기기에 대해 한의사에게 진단 보조도구로서의 사용을 허용하는 것은 국민의 선택권을 합리적인 범위에서 보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한의사가 진단의 정확성과 안전성을 보다 높이기 위해 보조적 진단수단으로 현대 과학기술에서 유래한 진단기기를 사용하는 것을 한의학적 원리와 배치되거나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한의사, 모든 첨단 의료기기 쓸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이날 대법원의 판결은 과거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상반되는 판단이다. 헌재는 지난 2013년 2월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을 금지한 의료법의 위헌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한 한의사의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헌재는 과학기술의 발전 등에 따라 전향적으로 결정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며 “이번 판결이 헌재 결정 및 헌재 결정의 취지와 배치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이 한의사가 모든 현대적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취지는 아니다”라며 “명시적으로 사용을 금지하는 법이 없으면서 진단용 의료기기인 경우에 한정해 보조 수단으로 쓰면 의료법 위반이 아니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방사선을 이용한 엑스레이(X-ray)나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장치(MRI)는 한의사의 사용이 법으로 금지돼 있다.
안철상·이동원 대법관은 “우리 의료체계는 양방과 한방을 엄격히 구분하는 이원화 원칙을 취하고 있고 의사와 한의사를 구별해 면허를 부여하는 만큼 초음파 진단기기를 사용하면 무면허 의료행위”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