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생길 지경"…대기업 물밑 '조용한 해고'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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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기 하락 이후 대기업이 간접적으로 일자리를 줄이는 '조용한 해고'에 나서고 있다. 희망퇴직이나 정리해고 요건이 까다로운 상황에서 간접적 구조조정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사진은 서울 중구의 사무실 밀집 지역의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시민들. 연합뉴스

글로벌 경기 하락 이후 대기업이 간접적으로 일자리를 줄이는 '조용한 해고'에 나서고 있다. 희망퇴직이나 정리해고 요건이 까다로운 상황에서 간접적 구조조정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사진은 서울 중구의 사무실 밀집 지역의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시민들. 연합뉴스

대기업 A사 인사팀 간부 김모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팀원들이 업무에 어려움을 호소해서다. 이 회사는 최근 비공식적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희망자에 한(限)한다’지만 저성과자나 고연차 직원을 대상으로 한 회유에 가깝다. 조직 슬림화와 직무 재배치도 진행해 결국 자리를 줄여야 한다. 그래서 퇴직 의사를 묻거나 자리 축소를 통보해야 하는 인사팀 직원들은 “해당 부서와 당사자의 격한 반응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라고 호소한다.

[L 공포의 기습] 대기업 중심으로 비공식적 감원 #글로벌 경기 직격탄에 경직된 고용 문화도 한몫 #중견·중소기업으로 확산 땐 ‘태풍급 한파’ 될 수도

기업들이 인원을 줄이는 건 코앞에 닥친 경기 침체와 실적 악화 우려에서다. 김씨는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대외적으로 채용 축소나 구조조정을 이야기하기 힘든 것 같다. 과거의 인적 구조조정이 ‘공식적’이었다면, 지금은 물밑에서 ‘조용한 해고’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 국내 고용 시장에 ‘조용한 해고’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공식적인 구조조정이나 희망퇴직 대신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력을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9일 새벽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인력시장에서 일자리를 찾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정준희 기자

지난 9일 새벽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인력시장에서 일자리를 찾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정준희 기자

최근 화제가 됐던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하며 건강한 삶을 우선한다’는 의미라면, ‘조용한 해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자리의 단절을 의미한다. ‘L(layoff·해고)의 공포’가 새로운 얼굴로 습격한 셈이다.

이지만 연세대 경영대학장은 “희망퇴직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임금 체계를 합리적으로 개편·조정하지 못하면서 경기 불확실성을 우려하는 기업이 ‘조용한 해고’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해고하기 힘든 노동시장 경직성과 정부 등 외부 시선에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 글로벌 경기에 휘청이는 산업구조도 조용한 해고를 부추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에선 테크기업에 다니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조용한 사직’ 열풍이 일고 있지만 고용 시장은 안정적이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달 실업률은 3.7%로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다. 코로나19 회복에 따라 노동력 수요가 상승하고 있어서다.

반면 한국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조용한 해고’라는 고용 삭풍이 불어닥쳤다. 이는 중소·중견 협력기업의 폐업이나 구조조정 같은 ‘태풍급 일자리 한파’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고용 시장이 직격탄을 맞는 셈이다.

B바이오 기업은 지난달 직원 설명회를 열고 근태와 성과 등을 따져 인력을 재배치하겠다고 공지했다. 조만간 휴게공간과 카페 등에 사원증을 대야 출입할 수 있는 ‘게이트’를 설치할 예정이다. 근무시간을 엄격하게 관리하겠다는 경영층의 지침에서다. 진행 중이던 채용도 필수직을 제외하곤 ‘올스톱’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이 회사 관계자는 “갑작스런 저성과자 재배치를 구조조정 수순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곳곳에서 ‘실적도 좋은데 왜 이러느냐’고 수군거린다. 일부 고참급 무보직 간부는 사표를 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미 실적이 크게 악화했거나 악화를 예상하는 기업들은 공식적으로 감원 절차에 들어갔다. 롯데면세점이 창사 이후 첫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고, 롯데하이마트도 희망퇴직 대상자를 찾았다. LG전자 계열사인 하이프라자와 하이트진로, 오비맥주 등이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희망퇴직이 ‘상시화’한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하이투자증권·다올투자증권 등 증권사와 우리은행·NH농협은행·수협은행 등도 희망퇴직을 받았다. 올해 5대 시중은행에서만 2400여 명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그렇다고 신규 채용 규모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대기업들은 지난 5월 윤석열 정부 출범에 맞춰 고용 확대를 약속했다. 삼성(8만 명), SK(5만 명), 현대차(3만 명) 등 10대 그룹이 약속한 신규 채용 규모만 38만 명이 넘는다. 실제로 올해 채용은 예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 하지만 경기 하락과 실적 악화로 내년에도 같은 규모를 유지하긴 어려울 전망이다.

하지만 어느 대기업도 “내년 신규 채용을 줄이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경기가 더 악화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기업은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정부도 올해만큼 고용을 늘리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2022 한국 제약바이오 채용박람회'에서 한 구직자가 면접장으로 향하고 있다. 뉴스1

지난 10월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2022 한국 제약바이오 채용박람회'에서 한 구직자가 면접장으로 향하고 있다. 뉴스1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달 내놓은 ‘2022 하반기 경제전망’은 내년 취업자 증가 수가 올해 79만 명 대비 10분의 1 수준인 8만 명으로 예측했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발간한 ‘경제전망 보고서’ 역시 내년 증가하는 취업자 수를 9만 명으로 내다봤다. 올해 전망치(82만 명)에 비해 급감했다. 기획재정부가 21일 발표한 ‘2023년 경제정책 방향’에서도 내년 취업자 증가 숫자는 10만 명으로 지난 6월 전망치 15만 명보다 줄었다.

이런 전망이 현실화한다면 2018년 이후 처음으로 신규 취업자 증가 수가 연간 10만 명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한 2020년 제외) 임영태 한국경영자총협회 고용정책팀장은 “당시엔 주 52시간제 도입과 최저임금 상승으로 취업자 수가 줄었다”며 “내년은 올해 기저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취업자 증가 폭이 급락할 전망이며, 불경기로 기업들이 일자리를 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는 “위기일수록 정부와 기업이 기업가정신을 갖고 새로운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며 “당장 비용을 아끼고 몸집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인식의 전환이 고용 안정도, 성장도 이룰 수 있는 해법”이라고 말했다.

☞조용한 해고=기업이 조직 슬림화나 직무 재배치로 자리를 줄이거나 비공식 희망퇴직자를 모집하는 등 외부에 알리지 않고 진행하는 감원을 말한다. 미국의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일자리보다 삶의 질에 비중을 두겠다는 능동적인 변화라면, 한국의 ‘조용한 해고’는 노동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직업 경력이 단절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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