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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사원부터 임원까지…횡령엔 위아래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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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2018년 서울의 모 중소기업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한 A씨는 출근 이튿날 회사 계좌에서 350여만원을 자신의 계좌로 이체했다. 수시로 소액을 이체하는 방식으로 보름 만에 800여만원을 훔쳤다. 그는 지난해까지 3년간 회사를 다섯 군데 옮겨 다녔다. 마지막 회사에선 대표이사 명의의 위임장까지 위조해 5억원을 횡령하다가 꼬리가 밟혔다. 횡령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전 직장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새 회사에서 횡령한 돈으로 배상하는 '횡령 돌려막기'도 했다. A씨는 2016년에 이미 1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벌금형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러나 횡령범의 이직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지난해 발생한 업무상횡령 범죄는 2014년 대비 약 34% 증가했다.

지난해 발생한 업무상횡령 범죄는 2014년 대비 약 34% 증가했다.

21일 검찰에 따르면 업무상 횡령 범죄는 지난해에만 5만1793건 발생했다. 2014년 3만8646건에 비해 34% 늘었다. 중앙일보 이노베이션랩은 늘어나는 횡령의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업무상 횡령 사실이 공개된 1, 2심 형사사건 판결서 1년치(2021년 8월~2022년 8월) 100건을 전수 조사했다. 금융기업 내부 횡령은 제외했다. 평범한 기업에서 벌어지는 횡령 양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경리사원부터 임원, 대학 총장까지 범죄에 연루된 ‘횡령 공화국’의 민낯이 드러났다.

횡령 판결 100건 분석 결과 #변제액은 22%에 그치고 #제대로 된 내부통제 없어

횡령 당사자는 관리직(44명), 경리직(22명), 일반 직원(9명)부터 대표이사나 총장 등 임원급(11명)까지 지위를 가리지 않았다. 회삿돈을 개인 계좌로 옮기거나(45건), 법인카드나 회사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45건)하는 형태가 가장 많았다.

횡령범을 잡아도 손해를 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100건의 총 횡령액(137억원) 대비 변제액은 22%(30억원)에 불과했다. 전액 배상 사건은 12건뿐이었다. 65건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처벌이 무거운 것도 아니다. 법원은 92건의 범죄에 징역 6개월형부터 최고 6년형을 선고했으나 57.6%(53건)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나머지 8건은 150만~10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피해 기업에는 대부분 횡령을 감지하거나 예방하는 시스템이 없었다. 전사적자원관리(ERP) 등 내부 확인 시스템을 갖췄음에도 횡령을 막을 수 없었던 2건 등을 제외하면 96건이 관리 솔루션 없이 사람에게 숫자를 맡겨온 기업에서 벌어졌다. 김성환 국제공인내부감사는 "내부 통제가 일상에서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을 때 부정·비리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지용구 더존비즈온 솔루션사업부문 대표는 "데이터 간 연결을 통해 실시간으로 자금의 흐름을 예측하는 자금 이상거래 탐지 시스템을 도입하면 단순 횡령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영민·정세희 기자 park.y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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