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쉬운데?"…5개 회사 옮기며 9억 연쇄횡령, 왜 몰랐나 [횡령공화국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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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령은 기업을 휘청이게 하고, 수많은 이해관계자에게 손해를 끼친다. 검찰의 『분기별 범죄 동향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해 업무상횡령 범죄는 5만1793건. 2014년 3만8646건 대비 34% 늘었다. 7년간 연평균 약 5%씩 증가한 셈이다.

중앙일보 이노베이션랩은 횡령이 일어나는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기존 사건을 분석했다. 법원 열람 서비스에서 업무상 횡령 범죄 사실이 공개된 1, 2심 형사사건 판결서 1년치(2021.8~2022.8) 100건을 전수 조사했다. 전문 범죄에 해당하는 금융기업 내부 횡령은 제외했다. 비금융권의 평범한 기업에서 벌어지는 횡령 양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경리사원부터 임원, 대학총장까지 범죄에 연루된 횡령공화국의 민낯이 드러났다. 이를 두 차례 나눠 연재한다. 판결서 내용은 이미 비실명처리 됐으나,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해 사건과 사건관계인을 특정할 수 없도록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편집자주]

횡령공화국① 사건의 재구성: 연쇄횡령범 A의 이직

지난해에 발생한 업무상횡령 범죄는 2014년 대비 약 34% 증가했다.

지난해에 발생한 업무상횡령 범죄는 2014년 대비 약 34% 증가했다.

A씨는 2018년 서울의 어느 중소기업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 출근 이튿날, 350여만원을 회사 계좌에서 자신의 계좌로 이체했다. '너무 쉬운데?' 20여분 뒤 99만원을 더 옮겼다. 그 다음주 100만원, 또 110만원…. A는 출근 보름만에 한 달 월급의 4배가 넘는 800여만원을 훔쳤다. 그는 한 직장을 오래 다니지 않았다. 2021년까지 3년간 총 5개의 회사로 적을 옮겼다. 이직할 때마다 더욱 과감해졌다. 100만원 단위로 이체했던 초기와 달리 1000만원, 3000만원으로 이체액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많게는 한꺼번에 5000여만원을 빼돌렸고, 마지막 회사에선 8개월간 5억원 이상을 횡령했다.

범행이 발각돼 수사와 재판을 받는 와중에도 횡령은 계속됐다. 퇴사 후 뒤늦게 알아차린 전 직장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새로운 회사에서 횡령한 돈으로 피해액을 배상했다. '횡령금으로 배상금 돌려막기' 수법에 경찰도, 검사도 두손 두발을 들었다.

아무도 몰랐던 A씨의 횡령 전력

A씨는 출납 업무를 담당했다. 법인 계좌의 자금 이체에 필요한 공인인증서와 직원들의 OTP 카드는 A씨 손에 있었다. 공인인증서와 OTP 카드만 있으면 온라인 뱅킹으로 100만원쯤 이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더 큰 돈을 횡령하려고 문서도 위조했다. 대표이사가 자신을 대리인으로 위임한다는 취지의 가짜 위임장을 만든 뒤, 은행 직원을 속여 법인 자금을 갈취하는 수법이었다.

법원은 120여회에 걸쳐 총 9억원을 횡령한 A씨에게 징역 6년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회사들의 피해가 회복되진 않았다. A씨는 피해 회사 중 한 곳에만 1억원을 돌려막기식으로 변제했을 뿐이다.

사실 A씨는 연쇄 횡령이 적발되기 전인 2016년, 1000만원가량을 횡령한 혐의로 벌금형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러나 이후 입사한 5개 회사에선 A씨의 전과 기록도, 검은 속내도 알아챌 방도가 없었다. 5개사 모두 경리 직원의 횡령을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은 없었다.

업무상횡령 100가지 사연

판결서 100건의 사연은 저마다 달랐다. 중앙일보는 ▶범죄자가 누구였고 ▶피해액 규모는 얼마에 달했는지 ▶법원이 범죄자들에게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등 세 가지 기준에 따라 사건을 분류했다.

누가 횡령을 했나
감사, 본부장, 사무국장 등 관리직이 44명, 경리직이 22명, 일반 직원이 9명, 판매사원 등 영업직이 7명 등으로 나타났다. 대표이사, 부사장, 대학교 총장, 지부장, 상무이사 등 임원급도 11명이나 됐다. 그 외 판결서만으로는 직책을 확인할 수 없는 피고인 7명도 있었다.

얼마나 빼돌렸나
판결서를 종합하면 횡령액은 최소 150만원에서 최대 9억원에 달했다. 평균 횡령액은 1억3866만원이다. 총 횡령액(137억원) 대비 변제액은 약 30억원(22%)에 불과했다. 100건 중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전액 배상한 사건은 12건뿐이었다. 피고인이 일부나마 배상한 11건, 앞으로 배상하겠다고 약속한 12건을 제외하면 65건은 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회사가 피해를 떠안았다.

어떤 처벌을 받았나
법원이 징역형을 선고한 판결은 100건 중 총 92건이다. 그중 53건은 형 집행 유예, 39건은 실형이다. 이들은 짧게는 징역 6개월, 길게는 징역 6년을 살고 있다. 징역 6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인 이는 앞서 소개한 전 경리직원 A씨다.

벌금형은 8건. 벌금 액수는 최저 150만원에서 최대 1000만원이었다. 법원은 8개 사건 가운데 7건에 대해 '피고인들이 벌금을 납입하지 못할 경우 10만원을 1일로 환산한 기간 피고인을 노역장에 유치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벌금에 상당하는 금액도 가납하라고 명령했다. 가납명령은 피고인이 벌금을 내지 못하게 될 경우에 대비해 형이 집행력을 얻기 전 미리 벌금에 상당하는 금액을 내도록 하는 처분이다.

회사를 속이는 4가지 횡령 수법

계좌이체형

경영관리처 직원인 B씨는 회계 담당자에게 마스크 등 물품을 구입하겠다며 계좌 비밀번호를 받은 뒤 사무실 금고에 보관돼 있던 공인인증서와 OTP 카드를 이용, 공금 800만원을 자신의 아버지 계좌로 이체했다. 이같은 방법으로 총 4회에 걸쳐 6700만원을 횡령했다.

회사의 돈을 자신의 계좌로 옮기는 건 100건 중 45건으로 가장 흔한 유형 중 하나다. 자금 관리상 허술한 점을 파고든 이들은 계좌이체 방식으로 수차례에 걸쳐 횡령을 시도했다. 회사 계좌에 있는 자금을 자신의 계좌에 이체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아내, 자식, 제수, 친구 등 가족이나 지인에게 송금한 사례도 있었다.

공금유용형

C씨는 물품 구입을 한다는 명목으로 회사에서 현금카드와 계좌 비밀번호를 받은 뒤 현금인출기(ATM)에서 회삿돈 70만원을 인출해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이후 같은 방법으로 165회에 걸쳐 총 1억2000만원을 횡령했다.

법인 명의의 계좌나 카드, 현금을 마음대로 사용한 케이스다. 역시 100건 중 45건이 이 유형에 해당했다. 공금유용형 횡령은 영업, 판매, 총무, 경리 등 다양한 업종에서 발생했다. 영업팀이 거래처에서 받은 대금 일부를 가져가거나, 판매팀 직원이 물건값을 현금으로 받고 따로 챙긴 사례도 있었다.

문서위조형

학교 법인 총장인 D씨는 자신의 업무추진비를 타인에게 격려금으로 교부한 것처럼 회계처리를 했다. 그러나 D씨는 실제로는 교부하지 않고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이렇게 총 500여만원을 횡령했다. 매출 관리 업무를 담당하던 E씨는 업무 일지를 임의로 수정한 후 차액을 빼돌리는 방법으로 총 154회에 걸쳐 1억여원을 횡령했다.

거액을 횡령하기 위해 문서를 위조하는 경우다. 이 유형은 100건 중 18건에 달했다. 장부 등 공문서를 조작해 원래 수령할 금액 이상을 챙기거나, 거래처로부터 수금한 적이 없는 것처럼 상황을 조작했다. 문서위조형 횡령 사건의 경우 대부분이 사문서위조죄, 위조사문서행사죄도 적용받았다.

물품판매형

마스크 제조사에서 근무하는 공장장 F씨는 마스크 8만여장을 임의로 판매하고 7000여만원을 빼돌렸다. 그로부터 마스크를 구입한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재판매해 이득을 취했다.

회사의 사유 재산이나 제품을 임의로 반출, 판매해 번 돈을 호주머니에 넣은 경우다. 100건 중 13건의 사건이 이 유형에 해당했다. 물품을 대가 없이 타인에게 넘기거나 자신이 사용한 경우는 업무상 배임에 해당하지만, 거래를 통해 판매금을 챙겼을 때 업무상횡령죄가 적용된다.

위의 4가지 유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서류조작·공금유용이 뒤섞이거나(7건), 계좌이체·서류조작(4건), 계좌이체·공금유용(3건), 임의사용·물품판매(3건), 서류조작·물품판매(2건) 등이 동시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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