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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홍준의 문화의 창

복제시대 예술작품의 ‘아우라’와 활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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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세기 초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서구 문명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면서 귀신같은 복제(複製) 기술이 등장했을 때, 예술가들은 자신이 하는 예술 작업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폴 발레리는 『예술론집』(1934)에서 “근래에 들어와서는 소재도 공간도 시간도 모두 과거에 존재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면서 “우리는 이러한 커다란 변혁이 예술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마침내는 어쩌면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극히 마법적인 방법으로 바꿔버리게 될 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 문제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예술 작품의 자율성과 고고한 분위기를 지탱해주는 근거로 ‘아우라(Aura)’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즉 예술작품은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이 갖는 일회적이고 유일적인 존재로서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데, 이 아우라는 복제할 수 없다고 했다. 아우라는 본래 사람이나 사물의 주위에 감도는 숨결, 또는 독특한 분위기를 의미한다.

복제 불가능한 예술품의 ‘아우라’
포스아트 철판 위에서 재현 시도
촉각으로 질감까지 느낄 수 있어
시각장애인 위한 미술관도 가능

그러나 벤야민은 예술품의 아우라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의 기술적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작품의 일회성이라는 고유성이 퇴색되고 아우라가 붕괴하는 현상은 오히려 대중예술의 정치적·사회적 실천의 바탕이 된다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사진과 영화 예술을 들었다.

그리고 근 10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복제기술은 점점 더 발전해 디테일까지 생생히 재현해 내는 정밀복제로 원화와 복제화를 구별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창작(생산)이 아니라 감상(소비)의 입장에서는 원화의 아우라까지는 아니어도 그 형태만은 실수 없이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예술품의 아우라로 가득한 박물관에서도 복제품이 원화를 대신해 전시되는 경우가 생겼고, 아예 정밀복제품에 의한 명화 전시회까지 열리고 있다.

원화의 정밀복제는 고도의 사진술과 인쇄술에 의지하는데, 마침내 세라믹 프린팅으로 수명을 지닌 종이나 천과 달리 반영구 보존이 가능하다고 자부할 정도까지 됐다. 일본 도쿠시마에 있는 오츠카(大塚) 미술관은 원화를 세라믹에 복제한 이를테면 ‘세계명화 반영구 레플리카’ 미술관으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제화가 원화와 크게 다른 것은 불규칙한 질감으로 나타낸 마티엘 효과를 재현하기 힘든 데 있다. 이는 평면 인쇄의 명확한 한계다. 그런데 포스코에서는 부식에 강한 고내식(高耐蝕) 철판에 질감까지 나타내는 포스아트(PosART)라는 놀라운 인쇄기술을 선보였다.

포스코센터 아트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철 만난 예술’전 포스터.

포스코센터 아트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철 만난 예술’전 포스터.

지금 서울 강남에 있는 포스코센터 1층 아트리움에서는 포스아트의 ‘철(鐵) 만난 예술-옛 그림과의 대화’전(내년 1월 6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등 한국 미술사의 명화 60여 점을 철판에 고해상도 잉크젯 프린팅 기술로 정밀 복제해 생생한 색감과 함께 섬세한 질감까지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울주 반구대 선사시대 암각화에서는 면 새김, 선 새김을 요철로 나타내 입체적인 질감까지 느낄 수 있다. 이 암각화의 예술적 아우라야 현지 대곡천변의 자연풍광 속에서 느낄 수 있겠지만, 현장에서는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그림을 손으로 만지면서 촉각으로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놀라운 기법의 명화 전시회를 보면서 나는 순간 지금껏 나의 이루지 못한 특수 미술관 프로젝트의 희망을 보았다. 20여 년 전, 원혜영 당시 부천시장과 나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미술관으로 ‘터치 미 뮤지엄(Touch me museum)’을 세우기 위해 많은 전문가와 함께 사례를 연구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시각장애인 미술관을 현장 답사하기도 했다.

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평면에 그린 회화 작품을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촉각으로 인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는데, 포스아트 기법으로 얼마든지 가능해진 것이다. 이를테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과 글씨를 요철로 표현하면 점자를 읽듯이 그 형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추진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미술관은 시행 단계에 들어갔을 때 안타깝게도 미술관 부지 주민들이 ‘혐오시설’이 들어온다며 반대했다. 이후 원혜영 시장이 부천을 떠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철 만난 예술’전을 보면서 이번에는 지자체가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포스아트의 기술을 빌려 시각장애인을 위한 국립미술관을 세웠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일어났다.

철판에 요철로 프린팅한 포스아트는 원화복제뿐만 아니라 인테리어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는데, 특히 문화재 안내판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고 있다. 지난 9월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2 국제 문화재산업전’에서는 양각 기법으로 철판에 프린팅한 문화재 안내판을 선보인 바 있다. 그리고 현재 경복궁 안내판은 이 포스아트로 교체됐다.

복제시대 기술은 원화의 아우라를 건드리지 않는 상태에서 이렇게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그리고 아주 유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