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누가 우리 아들·딸의 전기를 훔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허진 기자 중앙일보 기자
허진 정치팀 기자

허진 정치팀 기자

미래에, 어쩌면 가까운 앞날에 한국에는 ‘공정세대위원회’(공세위)라는 게 탄생할지도 모른다. 양성평등을 위해 여성가족부가 있고, 기업 간 불공정 경쟁을 막으려 공정거래위원회가 존재하듯 세대 간 평등과 공정을 위한 공적 기구의 필요성 또한 크기 때문이다. 연금개혁이니 재정건전화니, 돈과 관련된 공적 영역의 문제 대부분은 실상 세대 간 형평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시 지하철 요금이다. 지하철 기본운임은 2015년 1050원에서 1250원으로 200원 인상된 이후 8년째 동결이다. 그 사이 고령화는 급격히 진행돼 65세가 넘은 무료 이용객은 급증했고, 승객 1인당 손실은 1015원으로 늘었다. 도무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데도 여론 눈치를 보느라 요금을 올리지도, 무임승차 연령을 높이지도 못하고 있다. 적자가 쌓여 감내하지 못할 수준이 되면 언젠가는 결단을 해야 한다. 65세 기준을 높이거나 요금을 올리거나. 그럴 때 공세위가 나서 ‘단순히 요금만 올리면 젊은 세대에게 모든 부담이 전가되니 무임승차 기준을 최소 70세 이상으로 상향하라’는 결정문을 내는 거다.

지난 19일 한전 경기지역본부 전광판에 표시된 전력수급 현황. [뉴스1]

지난 19일 한전 경기지역본부 전광판에 표시된 전력수급 현황. [뉴스1]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지난 대선의 핵심 화두가 공정과 청년이었는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세대 간 공정의 문제에 둔감하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준 게 최근 한전법 논의다. 대다수 언론은 한전의 회사채 발행 한도를 최대 6배 확대하는 문제를 단선적으로 접근했다. “한전이 망하지 않게” 또는 “전기료가 폭등하지 않게” 당연히 국회가 한전법 개정에 협조해야 한다는 논조였다. 그런데 한전을 정부로, 회사채를 국채로, 전기료를 세금으로 바꿔보자. 무조건 협조하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룰 수 있을까. 아마도 여론이 요동쳤을 것이다.

한전 부실화를 이런 식으로 계속 임시 처방하면 미래 세대는 전기를 아주 비싼 값에 써야 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누군가는 갚아야 하는 게 빚이고 빚을 갚으려면 결국 전기료를 올려야 한다. 재벌집 막내아들로 태어나기는커녕 흥청망청 살던 조상을 만나 빚더미를 안고 태어나는 건 많이 억울하지 않나. 올바른 조상이라면 최소한 후손에게 덤터기를 씌우면 안 된다.

다시 서두로 돌아가면, 공세위 산하에는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돼야 한다. 누가 어떤 결정을 해서 미래 세대가 손해를 봤는지 나중에라도 꼼꼼히 따져야 한다. 한전법이 이대로 국회 문턱을 넘으면 공세위는 이렇게 적시할 것 같다. ‘누가 우리의 아들과 딸이 쓸 전기마저 미리 훔쳐서 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