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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범석의 살아내다

병원 대기실서 하하호호…무례하다 쏘아붙인 '아줌마 수다' 반전

중앙일보

입력

김범석 서울대 암병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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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종종걸음으로 아침 외래에 가는 도중이었다. 임상시험 센터 옆 대기실을 지나는데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힐끔 보니 한 무리의 중년 아주머니들이 떡과 과일 등 각종 먹을거리를 가져와서 판을 벌였다.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신나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수다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병원에서 저게 뭐하는 짓이람…, 엄연히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아픈 사람들 진료받는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저렇게 자기들끼리 모여서 간식 먹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들다니.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참 무례하다고 느꼈다.

한마디 하려다가 시간도 없고 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 속에서 내 환자를 발견했다. 어이쿠야, 저 아주머니 내 환자분인데. 어휴….  내 환자는 열심히 귤을 까서 옆의 아주머니들에게 나누어 주며 수다 떨고 있었다. 귤을 받은 아주머니는 또 옆의 아주머니에게 떡을 나누어 주고, 그렇게 맛있게 간식을 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외래에 와서 진료하다가 아까 보았던 그 환자 순서가 되었다. 다행히 환자의 치료 경과는 무척 좋았고 특별한 문제도 없어서 기존에 해오던 신약 항암 치료를 처방했다. 진료를 끝내며 조금 전의 일이 떠올라서 환자분께 한마디 쏘아붙였다. "아까 떡이랑 귤 맛있었나요?" 환자는 얼굴이 빨개지며 미안하다고 했다. 다른 환자들도 있으니 병원 대기 공간에서는 조금 조용히 해달라고 말씀드렸더니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연을 이야기해주었다.

항암 치료를 하면서 2주에 한 번 오는 일정이 비슷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게 되어 안면을 트고 지내는 환자들이 생겼다고 한다. 투병생활이 길어지면 남편이랑 애들이 있어도 어느 순간부터는 같이 와주지 않는다. 매번 같이 가자고 하기도 미안해져서 점차 혼자 오게 되는데, 어떤 때에는 가족보다도 동료 암 환자가 서로의 고충을 더 잘 이해해준다고 한다. 그렇게 동병상련하며 혼자 오는 암 환자들끼리 서로 알고 지내며 친해지며 언니 동생 하며 자연스럽게 모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알고 보니 간식을 먹는 데에도 사연이 있었다. 피검사 때문에 전날 밤부터 쫄쫄 굶고 와서 아침 식사도 못 한 채 피검사 하고 결과 나올 때까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병원에 사 먹을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한다. 집에서 주섬주섬 싸 온 음식을 혼자 먹으면 맛이 없는데, 함께 나누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모임에 좋은 면만 있지는 않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한명 두명 모임에 못 나오는 사람이 생긴다. 늘 나오던 사람이 안 나오면 ‘아…, 그분 안 좋으신가 보다. 그분 돌아가신 것은 아닐까’ 라고 하며 숙연해진다고 한다. 죽을 때 순서 없다는데 다음은 누구 차례가 될지 걱정이 된다고 한다. 동료 중에 누가 호스피스로 갔다는 소식이 들리면 다들 마음속으로 기도한다고 한다. 아프지 말고 편안히 가라고. 이번 생에 고생 많았다고. 하늘나라 가면 더 이상 아프지 말라고. 나중에 나도 따라갈 테니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2주 뒤에 다시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고 한다. 죽지 않고 살아서 와주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고맙다고 한다. 그렇게 반갑고 고마운데 귤이라도 하나 까서 줘야지…, 떡이라도 하나 줘야지…, 그렇게 모여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헤어지면서도 다음 달에도 또 만나자고 약속을 하면서 헤어진다고 한다. 또 만나자는 말의 뜻은 꼭 살아있으라는 서로 간의 당부였다.

벨기에 작가 테오도어 롬부츠(1597~1637)의 '탁자에서 카드놀이하는 여자와 남자'(1620).

벨기에 작가 테오도어 롬부츠(1597~1637)의 '탁자에서 카드놀이하는 여자와 남자'(1620).

그 모임에서 자기가 가장 오래 산 사람이어서 다들 자기를 보며 언니 언니 하며 따르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항암 치료 받으며 멀쩡하게 오래 잘 살 수 있느냐고 비결을 묻는단다. 내가 안 아프고 오래 살아야 다른 암 환자들에게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어느덧 왕고참이 되어있어 나를 의지하며 따르는 후배 암 환자들이 생겼는데 내가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잘 먹으라며 떡이라도 하나 챙겨주는 일밖에 없다고 한다. 평생 솥뚜껑 운전만 해서 할 줄 아는 일은 먹을 거 챙겨와서 잘 먹이는 일이라고. 지금도 항암 치료 받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 시댁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하는데 나는 팔자가 먹을 거 해와서 남들 배곯지 않게 하는 팔자인 것 같다고. 그래도 이렇게라도 계속 살아 있고 솥뚜껑 운전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환자분은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집에서 음식을 해와서 서로 나누어 먹고 수다 떠는 일은 애정을 표현하는 그녀들만의 방식이었다. 서로를 위하는 그녀들만의 방식이었다. 그녀들의 사연을 알고 나니 조금 전에 들렸던 아주머니들의 고성방가가 소음이 아니라 살아있음에 기뻐하는 소리로 들렸다. 암에 걸려서도 가족들 뒷바라지해야만 하는 그녀들의 고된 삶을 위로하는 소리로 들렸다. 혼자 와서 씩씩하게 치료받고 가는 그녀들이 서로를 응원하는 소리로 들렸다.

무례한 사람은 누구인가? 결국 무례한 사람은 나였다.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제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한 내가 무례했다. 예의도 없었지만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 더 문제였다. 모든 문제는 나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면서 바랬다. 떠들어도 좋으니 다음에 또 모이기를, 또 모여서 즐겁게 음식을 나누어 먹기를, 그녀들이 계속 살아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