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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는 어디까지 왔을까? 포문 열린 K-시, 새 바람 넣는 젊은 번역가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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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와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번역한 안톤 허(오른쪽)를 필두로 최근 떠오르고 있는 젊은 세대 번역가 집단은 소설뿐 아니라 시 부문의 변화도 이끌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와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번역한 안톤 허(오른쪽)를 필두로 최근 떠오르고 있는 젊은 세대 번역가 집단은 소설뿐 아니라 시 부문의 변화도 이끌고 있다. 연합뉴스

K팝, K소설, K콘텐트, 'K'가 붙으면 모두 흥했다. 지난해 특히 BTS, '오징어 게임'의 바람이 거셌다. '한국의 문화'가 하나의 공고한 장르가 된 느낌이다. 대중문화뿐 아니라 그림책『여름이 온다』로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부커상 후보로 오르며 한국 소설의 저력을 보여준 정보라·박상영 등 문학 분야에서도 존재감을 뽐냈다. K-시는 어떨까? 한국의 현대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해외에서 일구고 있다. 그런 사정이 국내에 오히려 덜 알려진 편이다.

수학 '필즈상' 격인 시 '그리핀상'…해외선 '김혜순' 현상

김혜순(67)시인은 시 부문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으로 꼽히는 '그리핀 시 문학상'을 수상한 아시아 최초의 여성으로, 현재 한국 시인 중 가장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인이다. 과거 고은 시인이 그리핀 공로상을 수상한 적이 있지만, 김혜순 시인은 2016년 펴낸 『죽음의 자서전』으로 작품에 주어지는 '본상'을 수상했다. 사진 문학과 지성사

김혜순(67)시인은 시 부문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으로 꼽히는 '그리핀 시 문학상'을 수상한 아시아 최초의 여성으로, 현재 한국 시인 중 가장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인이다. 과거 고은 시인이 그리핀 공로상을 수상한 적이 있지만, 김혜순 시인은 2016년 펴낸 『죽음의 자서전』으로 작품에 주어지는 '본상'을 수상했다. 사진 문학과 지성사

한국 시인 중 국제적으로 가장 뜨거운 이름은 지난달 영국 왕립문학협회가 선정하는 '국제작가'에 포함된 김혜순(67) 시인이다. 1955년생인 김혜순 시인은 1979년 첫 시 '담배를 피우는 시인'을 발표한 뒤 지금까지 30권이 넘는 시집을 펴냈다. 2019년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2021년 스웨덴 시카다상 등 국제 시문학상을 잇따라 받았다. 그리핀 시문학상은 수학의 필즈상에 비견되는, 권위를 인정받는 상이다. 영국 왕립문학협회 선정 국제작가 목록에는 앤 카슨, 마리즈 콩데,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즈 등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들이 들어가 있다. 미국 잡지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그리핀상 수상작인 김 시인의 『죽음의 자서전』에 대해 "놀라운 건축물이다. 구조적 참상과 개인의 죽음, 그 둘 사이의 연관을 충분히 드러낸다"고 평했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문학과지성사 이광호 대표는 "해외에서 한국 현대시는 김소월이나 이육사 같은 일제강점기 시인이나 분단국가 이미지를 드러내는 남성 시인들 위주로 지금까지 알려져 왔는데, 김혜순 시인을 기점으로 보다 현재성을 띤 보편적인 문학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본다"고 평했다.

『죽음의 자서전』은 스웨덴, 덴마크, 일본, 프랑스어 등 앞으로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을 앞두고 있다. 사진 김혜순 홈페이지 캡쳐

『죽음의 자서전』은 스웨덴, 덴마크, 일본, 프랑스어 등 앞으로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을 앞두고 있다. 사진 김혜순 홈페이지 캡쳐

계약금도 없이 드문드문 번역하던 한국 시… 이젠 먼저 연락 온다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2001년 이후 해외에 번역 소개된 한국 시집은 총 286종이다. 같은 기간 1090종 번역된 소설에 비하면 4분의 1 수준이지만 추세에는 변화가 있다. 2001~2010년 103종에서 2011~2020년은 155종으로 1.5배로 늘었다. 2021년부터 2022년 3분기까지 출간된 번역 시집은 28종에 달한다. 갈수록 많이 번역된다는 얘기다. 언어별로는 2001년 이후 28개 언어로 번역돼 36개국에 소개됐다. 영어가 110종으로 가장 많고, 독일어가 27종, 스페인어가 26종이었다. 번역 출판의 내용도 충실해진다. 문학과지성사 이근혜 주간은 "2010년 초반까지만 해도 계약금 없는 번역 출판 계약이 많았다. 유럽의 대표적인 북페어인 프랑크푸르트 도서전만 해도 4~5년 전까지는 참가에 의의를 두는 행사였다. 하지만 요즘은 한국 현대시 번역 출판을 희망하는 비즈니스 이메일이 먼저 보내오는 경우가 많다. 한국을 직접 방문해 미팅을 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포스트 김혜순' 나올까? '바이링구얼 세대' 번역가·시인이 온다

젊은 번역가들은 온라인을 통해 집단을 만들고 일감을 모은다. 왼쪽은 안톤 허가 이끄는 '스모킹 타이거즈;, 오른쪽은 소제가 이끄는 '초과'. 홈페이지 캡쳐

젊은 번역가들은 온라인을 통해 집단을 만들고 일감을 모은다. 왼쪽은 안톤 허가 이끄는 '스모킹 타이거즈;, 오른쪽은 소제가 이끄는 '초과'. 홈페이지 캡쳐

'김혜순의 선전'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간 주류였던 한국문학번역원·대산문화재단 같은 공적인 기관 외에도, 안톤 허가 이끄는 번역집단 '스모킹 타이거즈', 번역가 '소제(Soje)'가 이끄는 번역웹진 '초과' 등 최근엔 민간 차원에서 더 트렌디하고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읻다 출판사 김현우 대표는 젊은 번역가들을 모아 시 번역 에이전시 회사 '나선'을 세우기도 했다. '나선'의 13명 번역가 가운데 최재원·정새벽씨 등 4명이 현역 시인이고, 영어로 새 시집을 쓸 정도로 여러 언어에 능통하다.

김현우 대표는 "완벽한 이중언어(바이링구얼)를 구사하는 세대가 번역계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시 번역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는 중"이라며 "개별 번역가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체계화해 오래갈 수 있게 하고 싶어서" 에이전시를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동년배의 번역가가 번역하고, 실시간으로 해외에 소개한다는 게 과거와 달라진 가능성이다. 김 대표는 "노벨상이든 부커상이든 첫 번째 수상은 뛰어난 개인의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후속 수상자가 계속해서 나오려면 꾸준히 소개 시도가 필요하다"며 "이중언어 구사 번역가 세대가 제 자리를 잡는다면 한국 문학은 가장 롱런하는 한류 장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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