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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영업’이라는 망언 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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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며칠 전 퇴근 시간 지하철역, 인파 속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질 뻔했다. 모 대학 배낭을 멘 청년이 앞줄에서 갑자기 멈춰섰기 때문이다. 그의 스마트폰엔 장안의 화제, ‘재벌집 막내아들’ 드라마가 재생 중. 클라이맥스였는지, 그는 화면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자칫 도미노로 넘어질 뻔한 인파 속에서 54일 전 발생한 이태원 압사 참사가 겹쳤다. 멀쩡한 사람들이 걸어가다 죽을 수도, 혹은 죽일 수도 있다는 것. 이태원 참사가 남긴 여러 끔찍함 중 하나다.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20일 국민의힘 당사를 찾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 장진영 기자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20일 국민의힘 당사를 찾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 장진영 기자

참사는 또 다른 참사를 낳는가. 19일 여당 김상훈 의원이 ‘참사 영업’이라는 문구를 꺼낸 건 충격이었다. 159명의 생명이 사라진 ‘참사’와, 이익 창출을 위한 ‘영업’이란 단어는 섞일 수 없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20일 유가족을 면담한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참사 영업’ 발언을 덮기엔 부족하다. 발언의 취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두 단어의 조합은 역효과만 낳았다. 김 의원이 비판하려 했던 정치 세력을 도와주는 격밖에 되지 않아서다. 여당은 이 문제를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를 일. 알아야 고칠 텐데 알려고도 하지 않겠다는 아집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참사 영업’이라는 ‘망언 참사’ 대신, 필요한 건 서로를 위한 배려다. 이런 말 자체가 그러나 사치에 가깝다. 다 살기 힘든 세상, 나 혼자라도 살고 봐야 한다는 심리가 모두를 지배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치환됐던 한국의 근과거와 지금은 본질적으로 결이 다르다. ‘참사 영업’ 운운하는 세력이 놓치고 있는 게 이 지점이다. 이들의 청년 시절과 달리, 지금의 20대에겐 근면성실이 답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절망은 현재의 불만과 불안, 불행을 넘어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재벌집’이 20세기에나 가능했던 시청률 25%를 기록하는 것도, 타고난 현실을 노력으로 바꿀 수 없으니 판타지로 간접 복수를 하는 데서 쾌감을 찾는 시청자들 덕일 터. ‘재벌집’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인스타그램 릴스(숏폼 동영상)에선 그 드라마에 나오는 기업가들의 명언으로 성공을 다짐하는 것이 청년 세대의 현실이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 대다수가 바로 이 청년 세대였는데, ‘참사 영업’이라는 말의 조합을 들이민 게 정치권의 현실이다.

서로가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입은 잠시 닫고 귀를 열 수는 없는 걸까. 입은 하나고 귀는 둘이다.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마저 이렇게 말했거늘. “내 믿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내 생각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