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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세계 유일의 명지대 바둑학과 폐과 위기 넘기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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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2001년 명지대 바둑학과가 배출한 첫 외국인 졸업생들이 재학생과 포즈를 취했다. [중앙포토]

2001년 명지대 바둑학과가 배출한 첫 외국인 졸업생들이 재학생과 포즈를 취했다. [중앙포토]

고건 전 총리는 명지대 총장을 지낸 적이 있다. 어느날 그분이 불러 광화문 한 식당에 갔다. 바둑학과를 만들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바둑이 학문이 될 수 있을까. 아득한 역사를 지닌 바둑이니 학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학과를 만들 정도인가. 그게 가능할까.

고건 총장은 “바둑은 자격이 있다”고 했다. 한국바둑은 지금 세계최강이지만 승부 일변도로 달려와 문화적 향기가 부족하다고 했다. 바둑학과는 그걸 채워 바둑을 깊이 있게 만들 것이다. 한국은 진정한 세계바둑의 메카가 될 것이다.

고건 총장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1997년 바둑학과가 탄생했고 이후 외국 유학생들이 몰려든 바둑학과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분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곤 했다. 함부르크에서 정수현 바둑학과 교수(프로9단)가 유럽 바둑강사들을 상대로 강의한 일이 있었다. 유럽 각지에서 20~30대 젊은 남녀들이 모였다. 바둑 실력은 아마 유단자에서 10급까지 천차만별이었지만 이들은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바둑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바둑학과에 가서 정식으로 배우고 싶다.”

다니엘라 트링스는 독일 여자챔피언이었는데 어느 날 무작정 한국에 나타나 바둑학과에 편입했다. 트링스는 그후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바둑학과 교수다.

미국에서 게임이론을 전공하는 경제학 교수가 한국인 조교와 함께 한국기원을 찾은 일이 있다. 그는 ‘끝내기 문제’를 잔뜩 들고 있었다. 처음엔 우습게 알았지만 그 문제들은 심오했다. 프로들도 잘 풀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둑에선 새까만 하수인 미국 경제학 교수가 순전히 게임이론을 통해 만든 끝내기 문제를 한국 프로가 어려워한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바둑은 다른 학문과 연계하여 풀어낼 수 있는 많은 보따리를 숨기고 있는 것 아닐까.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제2의 아인슈타인으로 떠오른 천재 존 내시는 바둑을 둔다. 중국드라마 ‘천룡팔부’에서는 바둑이 생사를 가름한다. 세상의 눈에 바둑은 아직 신비스럽다. 풀어야 할 비밀이 많다.

바둑학과 폐과 논란 때문에 바둑 동네가 연일 시끄럽다. 바둑학과 출신들은 한국기원, 바둑TV, 인터넷 바둑사이트 등 바둑과 관련된 모든 곳에 진출해있다. 한국기사들은 물론 커제 등 외국기사들도 반대 서명에 동참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바둑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바둑은 오랜 세월 정처 없이 살아왔다. 고대로부터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둑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바둑은 사람을 몰입시킨다. 시간을 빼앗고 할 일을 잊게 만든다. 미워할 만 하다. 그러나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둑에는 삼라만상의 이치가 담겨있고 삶의 지혜가 새겨져 있다고 자부한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바둑을 안빈낙도의 상징으로 차용했다.

바둑은 바둑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그건 바둑꾼들의 은근한 자랑이었다. 현실은 달랐다. 이창호 군대 문제가 보여줬듯 제도권에 소속을 두지 못한 바둑은 대접받지 못했다. 이창호 문제는 100명이 넘는 여야 국회의원들이 힘을 합해 해결했지만 바둑은 이때부터 ‘소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바둑은 오랜 논란 끝에 스포츠의 길을 가게 된다. 대학체육회에 가맹했고 전국체전에 바둑 경기가 열리게 됐다. 정부에서 처음 돈도 받게 됐다. 기존 체육계의 반대가 거셌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바둑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됐고 한국이 금메달을 독식하며 분위기는 정돈됐다. 코로나로 연기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도 바둑이 정식종목이다. 바둑은 마인드스포츠로서 자리를 잡았고 올림픽에도 종목신청이 접수됐다.

바둑학과 폐과 얘기가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만 옛이야기를 늘어놨다. 창작 소리꾼 임진택은 바둑을 ‘인류문화사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말하며 바둑을 판소리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세계 유일의 바둑학과가 위기를 넘어 더욱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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