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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노조 회계 투명성 필요…자율·자치 훼손 않고 무역제재 피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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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셔터스톡]

[그래픽=셔터스톡]

노조 재정의 투명성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18일 당정협의회에서 "노조 재정 운영의 투명성처럼 국민이 알아야 할 부분에 있어선 정부가 과단성 있게 요구하겠다"고 하면서다.

이런 논란은 노조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상당수 노조에서 조합비의 운영 내역이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깜깜이로 집행된다. 조합비가 조합원의 복지보다 투쟁에 소진되기 일쑤다. 조합원이 노조 재정 운용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도 제한적이다. 공개적이지 않고 폐쇄적이어서다. 이 때문에 내부 횡령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그렇다고 국가가 노조 재정 운용에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또다른 문제다. 헌법과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위반 논란에다 자칫하면 무역제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한 총리가 노조 재정과 관련, '국민이 알아야 할 부분'이라고 한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조합비를 국민이 내는 세금과 동일시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서다. 조합비는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이 내는 회비의 성격을 갖고 있다. 조합비를 낸 당사자가 해당 노조에 제기할 문제이지 국민이 알 사안이 아닌 셈이다. 따라서 '정부의 과단성 있는 요구'는 월권에 해당할 수 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동3권은 자유권에 해당한다. 대원칙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로 집단적 노사관계에서 국가 불개입은 헌법적 원칙이다. 정부가 노조 운영에 개입하는 것은 이를 위반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노동시장 개혁의 큰 원칙인 '자율과 자치'에도 배치된다.

무엇보다 국가가 노조 운영에 개입할 경우 국제적인 분쟁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노동시장 개혁 권고안을 낸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권순원 좌장(숙명여대 경영학 교수)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이라며 "냉정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비준한 ILO 제87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협약' 제3조는 근로자와 사용자 단체에 대한 공공기관의 제한과 간섭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ILO 결사의 자유위원회가 협약 위반 여부를 판정할 때 '일반 원칙'은 '공공당국이 노조 재정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는 일반적인 정기보고서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이다. 예외적으로 노조 재정 운용에 부정이 추정되거나 단체의 회원이 부정을 신고한 경우에만 조사 등의 행정조치를 허용한다. ILO 협약을 어기면 국제 질서를 위반한 것이 돼 제재에 직면할 수 있다.

한국이 지난해 비준해 올해 4월부터 적용되고 있는 ILO 협약 제87호 제3조.

한국이 지난해 비준해 올해 4월부터 적용되고 있는 ILO 협약 제87호 제3조.

현행 국내 노조법은 ILO 협약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규정돼 있다. 조합비 횡령 등의 사안이 관청에 진정 또는 신고될 경우 결산 결과와 운영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고, 들여다볼 수 있다. 이를 통해 횡령 사건 등을 적발해 사법처리하기도 했다. 내부 조합원이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에 한해 정부가 개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자율과 자치의 영역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정부가 노동단체에 지원하는 돈에 대해서는 노조 내부의 문제 제기가 없더라고 정부가 감사할 수 있다. 이는 사용자 단체에도 적용된다. 국민 세금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원한 비용에 대해서는 매년 보고를 받고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국가가 노조 재정 운용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문제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행 제도를 보완할 필요는 있다. 노조의 재정운용이 그동안 무풍지대에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합원이 결산 자료를 열람해도 암호 같아서 비리나 방만 운영 실태를 찾기도 어렵다. 제도 정비가 필요한 이유다. 물론 ILO 협약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를 고려할 경우 일정 규모 이상의 노조에 대해서는 ▶재정 관련 연례보고를 의무화하고 ▶회계 전문 자격을 가진 감사를 선임하며 ▶외부 감사를 받도록 하는 방안 등이 제도 개선책으로 검토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단체가 시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사 대등의 원칙에 부합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런 방안은 노조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조의 민주성을 강화하고, 지속성을 높이면서 조합원을 단결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또 조합원의 진정이나 탄원이 있을 경우 행정관청이 조사에 나서는 법 조항(노조법 제27조)을 제대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은 노조의 반발과 조사의 어려움을 이유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법 조항이다.

<선진국과 다른 딱 한가지>

미국과 영국은 강력한 노조 재정 규제조치를 법으로 시행하고 있다. 나머지 선진국은 한국과 비슷한 형태로 자율과 자치권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재정 규율 장치를 운용 중이다.

미국은 '노사정보 보고·공개법(LMRDA)' 이른바 랜드럼-그리핀법에 의해 노동부가 회계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법에는 노조가 노동부(DOL)에 연차회계보고서를 제출할 의무, 노조와 사용자 간의 자금 이동 보고 등 강력한 노조 재정 규제 조항을 담고 있다. 조합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열람이 가능하다. 이 법은 매카시즘이 창궐하던 1959년 제정됐다.

영국도 연차보고서를 노동부 인준관에게 제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인준관은 한국 정부에는 없는 일종의 검사관으로 노조에 대한 재무 조사를 할 수 있고, 조사 결과를 해당 조합과 회계 감사원에게 제공한다. 또 노조 간부나 노조에 고용된 자 등은 회계감사로 선임할 수 없도록 명문화했다.

일본은 연례보고서를 제출할 의무는 없지만 회계보고를 매년 조합원에게 공표토록 하고 있다. 다만 회계 감사원의 자격은 전문적인 자격이 있는 자로 위촉해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에는 노조의 재정 운용에 대한 법적 규율이 없다. 노조 자체 규약으로 자율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규약에는 전문 회계사에 의한 감사, 조합원에 공표 등이 예외없이 포함돼 있다.

선진국 제도의 공통점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전문적인 자격이 있는 사람을 회계 감사로 선임한다는 점이다. 한국과 다른 점이다. 한국은 노조 위원장이 자격 여부와 관계없이 노조 내부자를 회계 감사로 지명해서 처리하면 그만이다. '깜깜이 재정' 논란이 불거지는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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