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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왕 사망에도 "보증금 당장 못줘"…믿었던 보증보험의 배신 [빌라왕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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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서울 강서구 소재 한 빌라를 2억4500만원에 임차한 A씨는 계약 만료일(지난 11월)이 다가와 지난 8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지만, 집주인은 묵묵부답이었다. 내용증명을 보낸 뒤에야 돌아온 집주인의 반응은 “종부세(종합부동산세)가 너무 많이 나와서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 집도 압류돼 공매로 집이 넘어갈 수 있다”는 날벼락 같은 내용이었다. 집주인은 수도권 일대 빌라와 오피스텔 등 1139채의 명의의 보유했지만, 지난 10월12일 숨진 채 발견된 일명 ‘빌라왕’ 김모씨였다.

 그러나 A씨는 김씨보다도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더 야속했다고 한다. A씨는 계약 당시 전세보증금반환 보증 보험에도 가입됐다. 그런데 김씨가 임대차 계약 만료 전 숨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김씨가 돌려주지 못할 상황이 된 만큼 HUG가 대신 보증금을 돌려줘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4촌 이내 친족이 주택에 대한 상속을 마쳐야 대위변제 절차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 절차가 마무리되는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씨가 62억여원의 세금을 체납한 상태여서 친인척들이 상속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A씨는 “당장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있는데 HUG는 구상권을 청구할 상대가 확정되기 전에는 세입자를 보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며 “제도에 구멍이 크다”고 토로했다.

'빌라왕'으로 알려진 김모씨가 지난 8월17일 서울 강서구 소재 빌라에 사는 세입자 A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의 내용. 김씨는 보증금 반환 요구에 “돈이 없다”고 하거나 돈을 더 내고 집을 사라고 요구했다는 게 세입자들의 주장이다. [사진 A씨 제공]

'빌라왕'으로 알려진 김모씨가 지난 8월17일 서울 강서구 소재 빌라에 사는 세입자 A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의 내용. 김씨는 보증금 반환 요구에 “돈이 없다”고 하거나 돈을 더 내고 집을 사라고 요구했다는 게 세입자들의 주장이다. [사진 A씨 제공]

세입자들 “임대인은 못 믿어도 HUG는 믿었다”

 빌라왕 김씨 일당이 저지른 대규모 전세 사기 사건에 휘말린 일부 세입자들은 “김씨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까 염려하자 (김씨 일당에 가담한) 공인중개사 등이 HUG 보증보험에 100% 가입할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고 말했다. 이들은 김씨와 임대차 계약을 맺을 당시 특약을 맺었는데 HUG의 전세보증금반환 보증 보험 등에 가입 승인이 나지 않으면 계약을 무효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김씨가 급사한 상황에서 HUG는 보험에 가입한 임차인들의 우려를 더욱 키웠다. 김씨로부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세입자들이 모인 커뮤니티의 운영진인 수원 파장동 빌라 세입자 배모씨는 “김씨가 숨졌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10월18일 회원 여럿과 함께 HUG 서울서부관리센터를 찾아갔다”며 “임차권 등기 신청을 해야 보증금 대위변제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등의 딱딱한 안내만을 받았다”고 말했다. 배씨는 “보증서에도 임대인 사망시에 대한 안내는 없었고, ‘전쟁이나 국가재난 발생시’ 같은 내용만 담겨 있었다”고 토로했다. 피해자 일부를 대리하는 박소예 변호사(법무법인 제하)는 “임대인이 사망하면 상속인이 보증금 채무를 상속하는데, 상속을 포기하면 상속재산관리인을 선임해야 하는 등 법률상 정해진 절차가 매우 복잡하다”고 말했다. 피해자들 입장에선 유사시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사기꾼들의 명분으로만 활용된 보증보험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임차인이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보험에 가입할 때 HUG가 해당 임대인이 주택을 총 몇 채 보유하고 있는지 등을 고려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통상 임차인은 임대차 계약을 맺은 뒤 보증 보험에 가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집주인의 다주택 등 문제로 인해서 사후 보증 보험 가입이 안 된다고 결정하면 임차인에게 큰 불이익이 가해진다는 이유에서다. HUG 관계자는 “임대인이 집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보증 보험 가입에 제한을 두지는 않았다”며 “임차인 보호를 우선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HUG 측 방침이 김씨나 2년간 공범들과 함께 주택 3493채를 매입한 ‘빌라의 신(神)’ 권모씨 일당 등과 같이 단기간에 주택을 다량 매입해서 전세 사기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사전에 감지하거나 제동을 걸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노태욱 서울부동산연구원 원장은 “한 사람이 수백, 수천채의 주택을 갖고 보증금 미반환 사고를 내도록 대응하지 못하고 방치한 것은 제도적으로 너무 무관심한 탓”이라며 “HUG가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 능력을 고려하는 지표를 만들어 보증 사고를 사전에 예방해야 피해가 커지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비하면 같은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보험 상품을 다루는 SGI서울보증은 임대인 1명당 가입할 수 있는 주택 수를 엄격히 제한한다. 임대인 1명당 1채만을 보증 보험 대상으로 할 수 있도록 한다. 임대인 1명당 2채까지 보험 가입 대상이 되려면 별도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SGI 관계자는 “(전세 사기로 인한 보증 사고 문제가 불거질 즈음인) 지난 2020년 2월 보증금 미반환 사고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내부 규정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최근 5년간 연도별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사고건수 및 사고금액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주택도시보증공사]

최근 5년간 연도별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사고건수 및 사고금액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주택도시보증공사]

“가입 기준 엄격히…대출 심사하듯 해야”

 빌라왕 김씨의 경우 보유한 주택 중 440채(814억원)가 HUG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대상이다. 지난달 기준 171건(334억원)의 보증 사고를 냈지만, 김씨는 사고 후 변제해 보증 보험 가입 금지를 풀었다가 다시 금지되기를 반복했다.

주택세입자 법률지원센터 '세입자114' 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강훈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대상 주택이 깡통주택인지 여부와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이 있는지 등 보증 상품 가입 기준을 대출 심사하듯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구체적으로 깡통전세로 의심되는 주택의 보증 가입을 제한하는 가이드라인으로 전세가율 80%를 제시했다.

김진유 경기대학교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HUG는 이미 전세 사기 의심 리스트(다주택 보증사고 채무자)를 내부적으로 구축했다”며 “보증 사고를 낸 전력이 있는 전세 사기 의심자를 HUG가 관리하면서 이들이 주택을 매물로 내놓은 경우 전세 사기 주의 표시를 한다면, 무책임하게 자기 자본 없이 수백채 빌라를 사들여 보증금을 빼돌리는 범죄를 사전에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지난 10월말 기준 전세보증금반환보증 보험 사고건수는 3754건에 사고금액은 7992억원으로 조사됐다. 사진은 지난 10월19일 서울 시내의 주택 밀집지역의 모습. 연합뉴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지난 10월말 기준 전세보증금반환보증 보험 사고건수는 3754건에 사고금액은 7992억원으로 조사됐다. 사진은 지난 10월19일 서울 시내의 주택 밀집지역의 모습. 연합뉴스

“임대인-임차인 정보 비대칭성 해소해야”

 임차인에게 임대인과 주택 관련 정보를 더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정보 요구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전세자금대출과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등 마련해둔 제도가 오히려 임차인의 부주의를 유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며 “임차인이 임대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정보 비대칭의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지난달 21일 임차인이 보증금 회수 과정에 위험 요소를 사전에 식별할 수 있도록 임대인에게 납세 증명서를 요구하고, 국세·지방세 미납 내역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국회도 국가와 시·도지사가 주택 임대차 계약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관련 기구를 설치토록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더불어민주당 허종식 의원 대표발의) 및 전세사기 연루 임대사업자와 공인중개사, 감정평가사의 처벌을 강화하는 관련 법 개정안(국민의힘 김학용 의원 대표발의) 등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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