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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노태우가 열고 노무현이 민 용산시대, 윤석열이 매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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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12> 용산공원과 이라크 파병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2022년이 저물어간다. 올해의 뜻깊은 일은 뭐가 있었을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용산 시대’를 꼽고 싶다. 서울 용산공원이 드디어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꿈이 윤석열 대통령의 집무실 이전으로 성큼 현실로 다가왔다. 노 대통령 구상에 완전히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비슷하게 가고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한 것부터 따지면 140년 만이다.

용산공원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건 2007년 6월이었다. 내가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있을 때 핵심 입법 과제였다. 원래 정부가 제출한 법안 명칭은 ‘용산민족역사공원 특별법’이었다. 용산공원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공원 명칭이 조금 달라졌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15년간 지지부진했던 용산공원
대통령실 용산 이전으로 가시화
“간섭과 침략과 의존의 역사 현장”
멋진 공원으로 국민에 돌려줘야

지난 6월 10일 시범 개방한 서울 용산공원을 시민들이 둘러 보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이날부터 열흘간 한시적으로 용산 공원 일부 구역을 개방했다. 사진 왼쪽에 옛 국방부 청사였던 용산 대통령실 건물이 보인다. 연합뉴스

지난 6월 10일 시범 개방한 서울 용산공원을 시민들이 둘러 보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이날부터 열흘간 한시적으로 용산 공원 일부 구역을 개방했다. 사진 왼쪽에 옛 국방부 청사였던 용산 대통령실 건물이 보인다. 연합뉴스

용산공원에 대해 노 대통령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노 대통령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수도 한복판에 외국군이 있느냐고 했다. 용산기지를 두고 “간섭과 침략과 의존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구한말에는 청나라 군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군대, 해방 후에는 미군이 주둔한 걸 이렇게 표현했다. 이런 ‘굴욕의 역사’를 빨리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용산에 있는 게 우방국 군대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

용산공원 조성을 서두르려면 미군을 경기도 평택기지(캠프 험프리스)로 신속히 보내야만 했다. 원래 노 대통령 임기 안에 미군기지 이전을 완료하는 게 목표였다. 그러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2008년 말까지는 미군이 용산에서 완전히 나간다는 협정을 맺었다. 세부 조건을 놓고 서로 밀고 당기는 협상도 벌였다. 노 대통령은 어지간하면 미군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라는 쪽이었다. 평택기지 면적(1467만㎡, 약 444만 평)은 용산기지의 다섯 배 정도 된다. 미군이 해외에 주둔하는 기지 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그 정도로 미군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했다.

“용산공원 지상에 건물 두지 말아야”

미군은 이런 것도 요구했다. 용산기지 영내에 미군 간부 숙소가 많이 있었다. 한국이 비용을 부담해 평택에 대체주택을 지어달라고 했다. 정부 안에선 미군 간부와 가족이 생활할 숙소를 우리가 지어주는 게 맞느냐는 말도 나왔다. 결국 우리가 양보해 대체주택 333채를 지어주기로 했다. 대신 주택 소유권은 우리가 갖는 것으로 했던 기억이 난다.

미군기지 이전 비용을 포함하면 겉보기엔 국방예산이 크게 불어난다. 국방부는 이전 비용을 제외한 실질적인 국방예산이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런 걱정을 덜어줘야 했다. 2006년 예산안부터 ‘주한미군기지이전 특별회계’를 편성했다. 내가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있던 때다. 일반 국방예산과 기지이전 예산을 별도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2004년 12월 8일 이라크 아르빌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자이툰부대 장병들과 함께 손을 들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중앙포토

2004년 12월 8일 이라크 아르빌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자이툰부대 장병들과 함께 손을 들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중앙포토

용산공원을 추진한 건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 노태우 대통령 때도 본격적으로 추진한 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 회고록(『성공과 좌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작통권(작전통제권) 환수, 주한 미군 재배치, 용산기지 이전 등은 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용산기지 이전은 보수와 진보의 구분을 넘어 역대 정부에서 공감대가 있던 사안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1990년 6월 미군과 용산기지 이전 합의서를 체결했다. 96년 말까지 기지 이전을 완료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미군이 떠난 용산기지에는 대규모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1차로 골프장 부지를 돌려받아 용산가족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더는 진전이 없었다. 이렇게 용산기지 반환은 멈춰버리고 세월만 흘러가는 상황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용산공원 구상이 노태우 정부와 다른 점도 있었다. 우선 사업 주체를 서울시가 아닌 중앙정부(건설교통부)로 바꿨다. 서울 시민만이 아닌 전 국민을 위한 공원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보다 더 좋게 만들어 세계적 관광지로 키우려고 했다. 그러자면 서울시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용산공원 지상에 단 하나의 건물도 짓지 말자고 했다. 용산공원 일부에 건물을 세우려고 했던 노태우 정부와는 기본 개념이 달랐다. 노무현 정부 때도 투자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공원에 건물을 넣자는 의견이 없지 않았다. 만일 공원 부지의 일부를 매각하거나 상업·주거용 건물로 개발하면 큰돈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게 노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였다. 물론 방문객을 위한 매점이나 공원 관리시설 등은 필요하다. 이런 시설은 전부 공원 지하에 두라고 지시했다. (※고건 전 총리에 따르면 노태우 정부 시절 서울시는 시청사를 용산공원 한쪽에 지으려고 구상했다. 당시 관선 서울시장이던 고 전 총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지하철 6호선 계획을 수립하면서 장차 시청사가 들어갈 위치 가까이에 녹사평역을 건설하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국민에 가까이 다가간 용산 대통령실

그 후 15년간 용산공원 조성은 지지부진했다. 한미연합군사령부(한미연합사)는 지난달에야 용산에서 평택으로 이전을 마무리했다. 미군도 서울에서 서둘러 나가고 싶지는 않았던 게 아닌가 추측한다.

지난 3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용산 대통령실 이전을 발표했다. ‘노무현의 꿈’을 잘 아는 나로선 기분이 너무 좋았다. 대통령실이 옮겨오면서 용산공원 조성도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은 건 잘한 일이다. 청와대는 위치부터 좋지 않았다. 중세 유럽 성주처럼 높은 곳에서 백성을 내려다보는 자리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 관저가 있던 곳이다. 예전에 고종도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구중궁궐인 경복궁을 떠나 백성과 가까운 덕수궁으로 옮겼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은 백성 위에 군림하던 성주의 자리를 벗어나 국민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의미가 있다. 용산 지역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의미도 동시에 갖고 있다.

“국가가 군대는 왜 보유합니까”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큰 이슈는 이라크 파병이었다. 내가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있던 2006년 11월의 일이다. 국회에 파병 연장 동의안을 제출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전투 능력을 갖춘 자이툰부대를 이라크에 처음 보낸 건 2004년 8월이었다. 이후 매년 국회 동의를 받아 파병 기간을 1년씩 연장했다.

만일 연말 국회에서 파병 연장 동의안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부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노 대통령 지지자들이 앞장서 파병 연장에 반대했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안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컸다. 일부 여당 의원은 철군 촉구 결의안까지 제출하며 노 대통령을 압박했다. 노 대통령도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고민했다.

그 무렵 다른 사안을 보고할 때였다.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노 대통령이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국가가 군대는 왜 보유하는 겁니까.” 그러면서 이런 논리를 폈다. “애초에 전쟁은 나쁜 것이고 군대도 필요 없다는 사람들에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래도 현실적으로 군대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가만히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려고 군대를 두는 게 아닙니다. 외국에서 작전 경험을 쌓을 기회가 오면 마땅히 파병해야 합니다.”

역사 얘기도 꺼냈다. “예전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의 나라 군대가 우리 땅에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전투해야 한다면 국내가 아니라 외국에서 해야 합니다.” 노 대통령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지자들과 반대되는 목소리지만 논리적으로 맞는다는 생각이 들 때 종종 보이는 반응이었다.

이라크 파병은 안보실 소관이어서 평소에는 내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었다. 안보실에선 나처럼 까놓고 얘기하진 못했을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파병 연장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건 노 대통령에게 설득력이 약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떠나서도 우리 스스로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결국 2006년 12월 1일 정부는 파병 연장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같은 달 2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자이툰부대가 이라크 현지에서 최종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건 2008년 12월이었다. 그 후 남수단이나 소말리아 해역 등에도 우리 부대를 파견했다는 뉴스를 봤다. 오늘도 멀리 다른 나라에서 임무를 수행 중인 장병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