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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수술받은 할머니를 8살 초등생 손녀가 보살펴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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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간병 대학생의 비극에 당국 지원 약속했지만

사각지대 여전한 부모 돌봄 ‘영 케어러’ 실태

서울시가 지난해부터 95명의 ‘영 케어러(Young Carer·가족 돌봄 청년)’를 찾아내 지원했다고 어제 발표했다. 장애나 질병 등을 가진 가족을 직접 보살피는 청소년을 발굴하는 정책은 의미가 크다. 지난해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성심껏 돌봐 오던 대학생이 끝내 부친을 방치하는 바람에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돼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줬다. 이 대학생은 지난 4월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1, 2심 재판부는 “어린 나이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건강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아버지를 기약 없이 간병해야 하는 부담을 홀로 떠안게 된 점” 등을 고려해 최저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 케어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픈 할머니를 위해 대신 설거지를 하고 있는 인아(가명·8)의 모습.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제공.

아픈 할머니를 위해 대신 설거지를 하고 있는 인아(가명·8)의 모습.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제공.

저출산 고령화로 상징되는 사회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영 케어러의 희생을 수반한다. 부모나 조부모가 중병에 걸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지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젊은 자녀와 손자 몫이 된다. 요즘엔 형제도 별로 없어 부양의 짐은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이런 현상을 간파한 영국, 일본 등에서는 영 케어러 지원 법령을 제정하고 정책을 개발해 왔다.

우리 정부도 대학생 간병의 비극을 계기로 대책 마련에 나섰다. 보건복지부가 처음으로 가족 돌봄 청년 실태조사에 착수했고, 서울 서대문구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원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2월 우리나라의 11~18세 영 케어러가 약 18만4000~29만5000명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영국·뉴질랜드·스위스 등의 선행 연구를 토대로 청소년 인구 중 영 케어러 비율(5~8%)을 계산한 결과다.

서울시가 찾아낸 95명은 영 케어러의 극히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최근 1년 사이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도움을 요청한 사례엔 아버지가 근육암을 앓고 할머니는 고관절 수술 등을 받아 가사를 해야 하는 여덟 살 아이가 포함됐다. 부친이 암으로 사망하고 모친도 건강이 나빠지는 바람에 집안일은 물론 어린 동생 육아까지 맡은 고등학생도 있다.

우리 사회가 영 케어러에게 무심했던 데는 가족 부양을 미덕으로 여겨 온 문화도 한몫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제 장애나 질병은 가족뿐 아니라 사회가 함께 돌봐야 한다는 인식 전환과 정책 지원이 시급하다. 복지부는 지난 2월 ‘가족 돌봄 청년 지원대책 수립 방안’을 발표하면서 “미래를 꿈꿀 나이에 생계를 책임지며 가족 돌봄의 부담까지 떠안은 청년들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 실태 파악조차 미흡하다. “특별법 형태로 만들어 지원하는 게 필요하지만 오래 걸릴 수 있으니 지방 조례 등으로 조치를 취하는 것도 방법”(권지성 한국침례신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이라는 전문가 조언을 참고해 한 명의 영 케어러라도 서둘러 위기에서 구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