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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여자가 하기 괜찮은 직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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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여성국 기자 중앙일보 기자
여성국 IT 산업부 기자

여성국 IT 산업부 기자

“기자는 여자가 하기 괜찮은 직업 같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취재원과의 식사자리에서다. 그는 “공공기관·은행을 빼면 언론사의 육아휴직·고용 보장이 괜찮아 보인다”며 이같이 말했다. 동기·후배 여성 성비가 높아 ‘그런 면이 있나’ 생각하다 ‘아차’ 싶었다. 여성과 다르게 누구도 남성이 하기 괜찮은 직업을 따로 구분하지 않으니까. 초등교사, 간호사도 남성의 ‘소수자성’은 경쟁력이다. 교대를 졸업한 친구는 “남자가 적으니 승진은 더 쉽다”고 말했다.

이달 초 대기업 임원 인사가 이어졌다. 삼성·SK·LG그룹에서 오너가 출신이 아닌 첫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나왔다. 일부 기업은 “여성임원을 늘려 다양성을 강화하고 있다”고 홍보했다. ‘유리천장이 깨진 대기업 인사’라며 여성 CEO 시대 개막을 알린 기사도 있었다. 한 헤드헌팅 기업에 따르면 국내 100대 기업 내 여성임원 비율은 5.6%(403명). 여기자협회가 조사한 32개 언론사 임원 성비 5.92%(9명)와 비슷한 수치다. 매년 증가 추세지만 OECD 평균 여성임원 비율(25.6%)과 비교하면 낮은 수치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며 이 수치는 개선될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지금껏 남성이 하기 괜찮은 직업으로 ‘임원’을 꼽은 것 아닐까 싶을 정도다.

지난 10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7% 런치클럽’의 오픈 토크쇼 행사 모습. [유튜브채널 EO 캡처]

지난 10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7% 런치클럽’의 오픈 토크쇼 행사 모습. [유튜브채널 EO 캡처]

30대 남성인 나는 세상이 거의 평등해졌고, 남녀평등이 6대 4 아니 51대 49쯤 왔다고 종종 느끼지만 현실은 다른 것 같다. 빠르게 변화하는 IT스타트업 업계는 어떠할까. 모 스타트업 공동창업자 30대 여성은 예비 남편과 살지만, 좀처럼 결혼 날을 못 잡고 있다. “투자자를 만날 때 결혼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업계 선배의 조언 때문. 여성 창업자의 결혼은 출산 가능성을 의미하고, 이 경우 투자받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결혼은 숨겨야 한다는 취지였다.

‘7% 런치클럽’이란 모임이 있다. 2019년 국내 벤처캐피탈 심사역 중 여성 비율 7%에 착안해 업계 여성 임원들이 ‘7%가 절반이 될 때까지 응원하고 일하자’며 만든 모임이다. 지난 10월에는 오픈 토크쇼를 개최해 일하는 여성들의 고민을 함께 나눴다고 한다. 성차별적 노동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이공계 여성들의 연대 ‘테크페미’도 활동 중이다. ‘여자가 하기 괜찮은, 괜찮지 않은 직업’을 허물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OECD는 2019년 성차별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이 글로벌 GDP의 7.5%라고 추정했다. 2016년 크레디트스위스는 여성임원이 15% 이상인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더 높았다고 발표했다. 사회학자 마이클 키멜은 성평등이 남녀 모두에게 유익한 이유로 성평등 지수가 높은 나라는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남을 꼽는다. 남성은 경제적 부양 부담에서 벗어나고, 남성이라 요구받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51대 49라 느끼는 주관적 감각은 현실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평등한 세상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